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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차
Warren 고등학교 선생님
데이비드 차는 워렌 (Warren) 고등학교에서 20년 동안 고등학교 사회 및 AVID 교사로 재직했습니다. 그는 지역 사회에 봉사하고 스키드 로우 (Skid Row)에서 사역을 하고 있으며, 한인이 정치적으로 더 많이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에 열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니어 클래스 AVID 교사인 그는 저소득층 고등학생들이 대학에 진학 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코리아타운에서 자라셨죠? 성장 과정은 어떠셨나요?
저의 가족이 80년대 중반에 한인타운 쪽으로 이사를 왔을 때, 저와 제 동생은 필리핀 갱(gang) 조직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한인타운에 사는 아이들은 길거리에서 춤을 추거나 더 나아가서 갱에 들어가거나 했어요. 그런데 제가 얼마되지 않아 저는 크리스천이 되었고, 이후 저는 갱을 그만두겠다고 했습니다. 갱에 들어갈 때 가입 절차로 매를 맞듯이 갱에서 탈퇴할 때에도 매를 맞아야 했는데 그들이 저에게는 매를 때리지 않았어요. 그래서 전 그냥 “그 갱이 나를 건드리지 않는구나"라고만 생각했어요. 그 후 저는 다른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 때부터 학교 성적도 좋아지고, 고등학교 회장도 되고, UCSD 대학에도 들어가고, LA Times에 기사도 실리고, 대학교 1학년때 내셔널 TV 에도 두 번이나 나왔어요. 저는 사회 통합 명목으로 LA에서 Valley까지 통학하는 학생이였어요. Valley에 사는 학생들이에게는 환영받지 못하는 학생이었죠. 그러나 그런 저에게 보내지는 찬사들은 저에게 매우 의미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사는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제가 대학교 2학년 때 청년부 목사님으로부터 저의 동생이 체포되어 재판 중에 있다는 전화를 받았어요. 그리고 결국 제 동생은 9년 동안 감옥에 수감되었지요.
‘Good Morning America’에서 형제가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에 관한 주제로 David와 동생분이 나오신 것을 보았는데요, 그때 당시 기분이 어떠셨나요?
저의 동생이 선고를 받기 전, 그 청년부 목사님이 그 고통스러운 몇 달 동안 저의 어머니를 법원으로 모셔다 드리고 어머니를 격려하며 시간을 보내주시던 그때, 그동안 제가 했던 모든 일들이 사실은 나의 이익만을 위한 것이었음을 깨달았어요. 오직 저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죠. 그것은 마치 제가 “자, 내가 이민자로서 이룬 것을 보세요! 나를 좀 봐주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그것은 전부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과 나의 의를 세우기 위한 것일 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저의 동생이나 집에 계신 부모님을 그렇게 신경 쓰고 있지는 않았으니까요. 제 생각만 하고 살았죠. 사실, 제 동생이 한번은 저에게 자신의 주변의 삶을 바꾸기 어렵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리고 격투기를 통해 다른 삶을 살아보기 위해 노력도 많이 했었죠. 그런데 그 때의 저는 그를 비판적인 눈빛으로 보았고, 그에게 “네가 충분히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형으로서 어떠한 격려도 해 준 적이 없었어요. 그러나 그 청년부 목사님께서 저와 저의 가족을 위해서 하는 것을 보고, 제가 은혜가 부족하다는걸 알게 되었어요. 제 인생엔 트로피가 가득했지만, 그것들에는 생명이 없었어요. 마치 저의 인생에 업적은 많지만 연민이 없었던 것처럼요. 게다가 엄마가 나중에 “David, 네가 갱을 떠났을때 왜 아무도 널 안 해쳤는지 궁금하지 않니?”라고 물으셨을 때 제가 모른다고 하자 어머니는 말씀하셨어요, “네 동생이 갱에 깊이 엮여 있었을 때, 그 조직이 네 동생을 리더로 만들고 싶어했어. 네 동생은 카리스마, 싸우는 능력, 똑똑한 머리, 그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었지.” 그래서 제 동생이 그랬대요, “봐봐, 내 형이랑 나 둘 중 누군가 인생에 성공을 해서 우리 부모님을 돌봐야 돼. 누가봐도 난 이미 인생을 망쳤으니까 그 역할은 David이 해야 될거야. 그러니까 David이 조직을 나가더라도 건드리지 마. 그러면 내가 이 조직을 크게 만들어 줄게” 라고요. 그리고 동생은 실제로 그렇게 했어요. 당시 90년대에 제 동생이 누구인지는 모두가 알았습니다. 제가 안전했던 이유는 동생이 늘 “David는 건드리지 마. 우리 부모님을 책임질 사람이야"라고 말하였기 때문이었던 것이죠. 제가 동생을 비판하고 있을 때, 동생은 저를 지키고 있었어요. 제가 그 때 깨달았어요. 제가 겉으로는 다 잘하고 있지만, 제 안에 제일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는 것을요. 그래서 그때 제가 회개를 하면서 결정했어요. 이제 저는 젊은 학생들과 일하면서 그들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주겠다고. 당시 제가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잘 알게 되었고, 그것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습니다.
동생 및 부모님과의 관계가 힘들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 점을 통해 무엇을 배우셨나요?
많은 시간이 흐르면서 부모님이 아무리 부족하더라도 그분들을 돌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됐어요. 성경책에 ‘만일’ 부모님이 차를 사주거나 좋은 옷을 사주면 존경하라고 써 있지 않아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나요? 그저 “부모님을 존경하라"고 써 있죠. 젊은 세대는 신기술을 사용할 줄 알고 SNS를 이용하며 빠르게 소통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더 빨리 더 효율적으로 될 수록 자기가 남들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너무 생산성과 능력으로만 우리의 가치를 매기는 것 같다는 생각도 가끔 듭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항상 스스로를 모든 방면에서 어필 하려고 하잖아요. 취직을 하든지, 대학원에 입학하든지, 사람을 사귀고 싶다든지 할 때요. 하지만 당신에게 아무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어떤가요? 당신 보다 똑똑하지 않고, 능력도 떨어지면요? 그 사람은 당신보다 가치가 없나요? 우리는 예의를 차리며 “아니요"라고 대답할 수 있겠지만, 당신의 관계들을 생각해 보세요. 당신은 어떤 사람들과 친한가요? 어떤 사람들과 멀어졌나요? 그리고 왜 그렇게 되었나요? 제가 ‘LoveLA Skid Row’ 사역을 위해 Skid Row에서 6년 동안 섬길 때, 매일매일 노숙자분들이 오셔서 진정으로 감사하다고 말을 하셨어요. 그 사람들은 제가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어요. 그분들은 하루하루 감사의 삶을 살 수 있는 법을 보여주었습니다.
AVID 프로그램에 대해서 굉장히 열정적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처음에 어떻게 참여를 하게 되었나요?
샌디에고 주립대학에 있는 교사 자격 프로그램에서 학생들을 각각 다른 조로 나누어 배정하는데, 저는 샌디에고의 가난한 동네에 있는 Crawford High/Mann Middle School 조로 들어가게 됐어요. 그 동네가 너무 가난해서 그 학교에서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들은 많이 없었어요. 제가 그 곳에 가기 1년 전, 그 학교에 동남아시아에서 온 학생들과 서아프리카에서 온 학생들 사이에 인종 갈등이 있었어요. 이 곳은 이민자들의 학교라기보다 피난민의 학교였어요. 교생으로서 제가 좀더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더 많은 일을 해야 했어요. 그래서 3가지 스포츠팀을 코치하게 되었고 AVID 특별반의 선생님으로서 추가 수업을 했어요. 그래서 AVID 프로그램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나중에 Downey Unified School District에 있는 Warren High School로 갔을때 AVID 프로그램을 소개하였더니 저보고 AVID를 맡아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 때는 제가 뭘 해야할지 잘 몰랐지만 이 프로그램이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것을 알았기에 하기로 했어요.
혼자 그 프로그램을 시작하고 운영하는 것이 힘드셨으리라고 상상되는데, 어떻게 성공 하셨나요?
Warren High School에서 AVID program을 막 시작하였을 때, 당시 불경기로 다른 수많은 프로그램이 중단되었어요. AVID program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재정이 필요한지 알고 있었기에, 당시 교감선생님께서 저를 부르셔서 그 프로그램 운영에 꼭 필요한 교생들에게 지불할 수 있는 재정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제가 해야 할 일이 있었어요.
NES라는 회사가 있는데, 사람들이 교사가 되기 위해 치루는 CBEST 시험을 운영하는 회사에요. NES는 한 달에 한 번 학교를 임대하여 시험을 진행하면서 교실당 90 달러를 지불하고 있었어요. 주차장 임대까지하면 300달러를 더 지불했지요. 당시 그 회사는 한 번에 약 20-30개의 교실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우리가 한달에 2,000-3,000 달러를 모금 할 수 있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새벽 4시40분에 학교에 도착해서 모든 일정이 끝나는 저녁 8시에 학교에서 떠날 수 있었어요. 교생들에게 급여를 주기 위해 연간 3만 달러 정도가 필요했기 때문에 이 일을 꼭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후 3년 동안 저는 한 달에 한 번, 때로는 한 달에 두 번, AVID 아이들과 함께 오전 4시 40분에 학교에 가서 시험이 시작되기 전에 교실 안의 모든 좌석을 시험 대열로 재정비 했습니다. 그리고 시험이 끝나면 우리는 각 교실로 돌아가서 쓰레기를 치우고 책상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화장실과 도서관을 청소하였는데 그러고 나면 저녁 8시쯤 모두 일을 마치곤 하였습니다. 그 당시 한 달에 한 번 일요일에 동생을 보기 위하여 12-15시간 걸리는 거리에 있는 주립교도소에 갔어야 했기 때문에 매우 힘들었습니다. 어머니는 옆좌석에서 주무시고 저는 몇시간을 운전을 하였습니다. 토요일에 NES 시험을 하고 다음 날 동생을 만나러 간 날도 있었어요. 그리고 월요일에 다시 일하러 갔었죠.
저의 가족이 80년대 중반에 한인타운 쪽으로 이사를 왔을 때, 저와 제 동생은 필리핀 갱(gang) 조직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한인타운에 사는 아이들은 길거리에서 춤을 추거나 더 나아가서 갱에 들어가거나 했어요. 그런데 제가 얼마되지 않아 저는 크리스천이 되었고, 이후 저는 갱을 그만두겠다고 했습니다. 갱에 들어갈 때 가입 절차로 매를 맞듯이 갱에서 탈퇴할 때에도 매를 맞아야 했는데 그들이 저에게는 매를 때리지 않았어요. 그래서 전 그냥 “그 갱이 나를 건드리지 않는구나"라고만 생각했어요. 그 후 저는 다른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 때부터 학교 성적도 좋아지고, 고등학교 회장도 되고, UCSD 대학에도 들어가고, LA Times에 기사도 실리고, 대학교 1학년때 내셔널 TV 에도 두 번이나 나왔어요. 저는 사회 통합 명목으로 LA에서 Valley까지 통학하는 학생이였어요. Valley에 사는 학생들이에게는 환영받지 못하는 학생이었죠. 그러나 그런 저에게 보내지는 찬사들은 저에게 매우 의미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사는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제가 대학교 2학년 때 청년부 목사님으로부터 저의 동생이 체포되어 재판 중에 있다는 전화를 받았어요. 그리고 결국 제 동생은 9년 동안 감옥에 수감되었지요.
‘Good Morning America’에서 형제가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에 관한 주제로 David와 동생분이 나오신 것을 보았는데요, 그때 당시 기분이 어떠셨나요?
저의 동생이 선고를 받기 전, 그 청년부 목사님이 그 고통스러운 몇 달 동안 저의 어머니를 법원으로 모셔다 드리고 어머니를 격려하며 시간을 보내주시던 그때, 그동안 제가 했던 모든 일들이 사실은 나의 이익만을 위한 것이었음을 깨달았어요. 오직 저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죠. 그것은 마치 제가 “자, 내가 이민자로서 이룬 것을 보세요! 나를 좀 봐주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그것은 전부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과 나의 의를 세우기 위한 것일 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저의 동생이나 집에 계신 부모님을 그렇게 신경 쓰고 있지는 않았으니까요. 제 생각만 하고 살았죠. 사실, 제 동생이 한번은 저에게 자신의 주변의 삶을 바꾸기 어렵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리고 격투기를 통해 다른 삶을 살아보기 위해 노력도 많이 했었죠. 그런데 그 때의 저는 그를 비판적인 눈빛으로 보았고, 그에게 “네가 충분히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형으로서 어떠한 격려도 해 준 적이 없었어요. 그러나 그 청년부 목사님께서 저와 저의 가족을 위해서 하는 것을 보고, 제가 은혜가 부족하다는걸 알게 되었어요. 제 인생엔 트로피가 가득했지만, 그것들에는 생명이 없었어요. 마치 저의 인생에 업적은 많지만 연민이 없었던 것처럼요. 게다가 엄마가 나중에 “David, 네가 갱을 떠났을때 왜 아무도 널 안 해쳤는지 궁금하지 않니?”라고 물으셨을 때 제가 모른다고 하자 어머니는 말씀하셨어요, “네 동생이 갱에 깊이 엮여 있었을 때, 그 조직이 네 동생을 리더로 만들고 싶어했어. 네 동생은 카리스마, 싸우는 능력, 똑똑한 머리, 그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었지.” 그래서 제 동생이 그랬대요, “봐봐, 내 형이랑 나 둘 중 누군가 인생에 성공을 해서 우리 부모님을 돌봐야 돼. 누가봐도 난 이미 인생을 망쳤으니까 그 역할은 David이 해야 될거야. 그러니까 David이 조직을 나가더라도 건드리지 마. 그러면 내가 이 조직을 크게 만들어 줄게” 라고요. 그리고 동생은 실제로 그렇게 했어요. 당시 90년대에 제 동생이 누구인지는 모두가 알았습니다. 제가 안전했던 이유는 동생이 늘 “David는 건드리지 마. 우리 부모님을 책임질 사람이야"라고 말하였기 때문이었던 것이죠. 제가 동생을 비판하고 있을 때, 동생은 저를 지키고 있었어요. 제가 그 때 깨달았어요. 제가 겉으로는 다 잘하고 있지만, 제 안에 제일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는 것을요. 그래서 그때 제가 회개를 하면서 결정했어요. 이제 저는 젊은 학생들과 일하면서 그들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주겠다고. 당시 제가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잘 알게 되었고, 그것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습니다.
동생 및 부모님과의 관계가 힘들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 점을 통해 무엇을 배우셨나요?
많은 시간이 흐르면서 부모님이 아무리 부족하더라도 그분들을 돌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됐어요. 성경책에 ‘만일’ 부모님이 차를 사주거나 좋은 옷을 사주면 존경하라고 써 있지 않아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나요? 그저 “부모님을 존경하라"고 써 있죠. 젊은 세대는 신기술을 사용할 줄 알고 SNS를 이용하며 빠르게 소통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더 빨리 더 효율적으로 될 수록 자기가 남들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너무 생산성과 능력으로만 우리의 가치를 매기는 것 같다는 생각도 가끔 듭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항상 스스로를 모든 방면에서 어필 하려고 하잖아요. 취직을 하든지, 대학원에 입학하든지, 사람을 사귀고 싶다든지 할 때요. 하지만 당신에게 아무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어떤가요? 당신 보다 똑똑하지 않고, 능력도 떨어지면요? 그 사람은 당신보다 가치가 없나요? 우리는 예의를 차리며 “아니요"라고 대답할 수 있겠지만, 당신의 관계들을 생각해 보세요. 당신은 어떤 사람들과 친한가요? 어떤 사람들과 멀어졌나요? 그리고 왜 그렇게 되었나요? 제가 ‘LoveLA Skid Row’ 사역을 위해 Skid Row에서 6년 동안 섬길 때, 매일매일 노숙자분들이 오셔서 진정으로 감사하다고 말을 하셨어요. 그 사람들은 제가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어요. 그분들은 하루하루 감사의 삶을 살 수 있는 법을 보여주었습니다.
AVID 프로그램에 대해서 굉장히 열정적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처음에 어떻게 참여를 하게 되었나요?
샌디에고 주립대학에 있는 교사 자격 프로그램에서 학생들을 각각 다른 조로 나누어 배정하는데, 저는 샌디에고의 가난한 동네에 있는 Crawford High/Mann Middle School 조로 들어가게 됐어요. 그 동네가 너무 가난해서 그 학교에서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들은 많이 없었어요. 제가 그 곳에 가기 1년 전, 그 학교에 동남아시아에서 온 학생들과 서아프리카에서 온 학생들 사이에 인종 갈등이 있었어요. 이 곳은 이민자들의 학교라기보다 피난민의 학교였어요. 교생으로서 제가 좀더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더 많은 일을 해야 했어요. 그래서 3가지 스포츠팀을 코치하게 되었고 AVID 특별반의 선생님으로서 추가 수업을 했어요. 그래서 AVID 프로그램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나중에 Downey Unified School District에 있는 Warren High School로 갔을때 AVID 프로그램을 소개하였더니 저보고 AVID를 맡아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 때는 제가 뭘 해야할지 잘 몰랐지만 이 프로그램이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것을 알았기에 하기로 했어요.
혼자 그 프로그램을 시작하고 운영하는 것이 힘드셨으리라고 상상되는데, 어떻게 성공 하셨나요?
Warren High School에서 AVID program을 막 시작하였을 때, 당시 불경기로 다른 수많은 프로그램이 중단되었어요. AVID program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재정이 필요한지 알고 있었기에, 당시 교감선생님께서 저를 부르셔서 그 프로그램 운영에 꼭 필요한 교생들에게 지불할 수 있는 재정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제가 해야 할 일이 있었어요.
NES라는 회사가 있는데, 사람들이 교사가 되기 위해 치루는 CBEST 시험을 운영하는 회사에요. NES는 한 달에 한 번 학교를 임대하여 시험을 진행하면서 교실당 90 달러를 지불하고 있었어요. 주차장 임대까지하면 300달러를 더 지불했지요. 당시 그 회사는 한 번에 약 20-30개의 교실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우리가 한달에 2,000-3,000 달러를 모금 할 수 있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새벽 4시40분에 학교에 도착해서 모든 일정이 끝나는 저녁 8시에 학교에서 떠날 수 있었어요. 교생들에게 급여를 주기 위해 연간 3만 달러 정도가 필요했기 때문에 이 일을 꼭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후 3년 동안 저는 한 달에 한 번, 때로는 한 달에 두 번, AVID 아이들과 함께 오전 4시 40분에 학교에 가서 시험이 시작되기 전에 교실 안의 모든 좌석을 시험 대열로 재정비 했습니다. 그리고 시험이 끝나면 우리는 각 교실로 돌아가서 쓰레기를 치우고 책상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화장실과 도서관을 청소하였는데 그러고 나면 저녁 8시쯤 모두 일을 마치곤 하였습니다. 그 당시 한 달에 한 번 일요일에 동생을 보기 위하여 12-15시간 걸리는 거리에 있는 주립교도소에 갔어야 했기 때문에 매우 힘들었습니다. 어머니는 옆좌석에서 주무시고 저는 몇시간을 운전을 하였습니다. 토요일에 NES 시험을 하고 다음 날 동생을 만나러 간 날도 있었어요. 그리고 월요일에 다시 일하러 갔었죠.
이 AVID 프로그램을 가르치고 결실을 맺기 위해서 David님의 젊은 시절을 바치셨네요. 혹시 ‘평범한' 젊은이들처럼 보내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는 없나요?
아직도 제가 26살이었을 때가 기억나네요. 발렌타인데이 주말이었는데 저는 저녁 7시 반에 도서관을 청소하고 있었어요. 제가 그때 이런 생각을 했었어요, “아 참, 나는 싱글 남자인데. 지금 나가서 연애를 하고 있어야 되는데 지금 이 밤에 청소를 하고 있네". 그때 조금 슬펐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말이죠, 이제는 AVID 선생님으로서 가장 기분 좋은게 언제냐 하면 주차장을 나가면서 AVID 티셔츠를 입고 집에가는 학생을 볼 때예요. 저 학생은 이 프로그램 때문에 자기가 대학을 간다고 믿잖아요. 그 덕분에 저는 미소를 짓게 됩니다. 지난 18년 동안 우리 AVID 학생을 4년제 대학으로 보내는 확률은 꾸준히 97%에요.
참 대단하네요. 아직도 그 프로그램을 위해 일하고 계시나요?
제가 이제 프로그램 코디네이터는 아니지만 저는 AVID 입시생과 함께 대학교 입학 지원서와 에세이를 도와주는 AVID 선생 중 한명이에요. 우리는 최근에 여름마다 6주 동안 하는 AVID 여름 학교 수업을 마쳤어요. 여름 학교는 아침 8시에 시작하는데 저는 아침 7-8시 사이에 AVID 입시생과 일대일로 만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엇에 관해 글을 써야할지 모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저는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그들과 같이 앉아서 간단한 질문지를 작성하게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 신중하게 탐색을 하면서 그들의 아이디어를 끌어낼 수 있게 됩니다. 학생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찾도록 도와주는 것은 굉장히 보람있는 경험이에요. 많은 학생들이 자기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엔 감정에 복받쳐서 울어요. 제가 이 학생들의 인생에서 중요한 시간을 함께 한다는 것이 교사로서 정말 보람이 있습니다.
David님의 헌신적인 모습이 존경스럽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선생님과 같은 생각을 갖게 만드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런 일에 좌절감을 느낀적이 있나요?
몇 년 전에 저의 좋은 친구, 그레이스 유(Grace Yoo)가 시의회에 출마했어요. 선거 날에 제가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할머니들은 투표소로 운전하여 모셔다 드리느라 일을 하루 못 갔어요. 할머니들이 우리를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어요. 그 할머니들은 한국계 미국인이 출마했다는 것 외에는 그 투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셨어요. 투표용지에 유 후보가 몇 번인지만 알고서 나오셨어요. 한 할머니를 모시러 갔을 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데, 말 그대로 90도로 허리가 굽으셨는데도 여전히 투표를 하기 위해 나오고 계셨어요. 할머니는 우리와 아이들을 위해 나오셨어요. 사회보장과 복지 수표를 받아 사시는 할머니들께서 투표하러 나오신 이유는 오로지 여기 미국에 있는 차세대 한국인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 이 할머니들이 투표의 결과로 그들의 삶이 바뀔 것이라 믿으셨을까요? 그 분들은 우리를 위해 투표하러 나오신거에요! 제 마음을 정말 아프게 한 것은 많은 친구들이 투표에 참여하지 않은 지역에 살고 있었고, 그들은 단지 저소득층과 노인 주택의 부족과 같은 문제가 당장 자기에게 개인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근 지역은 선거구가 이해관계에 따라 이리저리 변경이 되는 경향이 높기 때문에 코리아타운에서 투표권을 많이 얻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시의회는 어떤 방식으로도 우리 지역사회에 도움이 되어주지 못할거에요. 우리야말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싸워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자녀들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우리의 어르신들 처럼요. 하지만 많은 젊은이들이 이런 문제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요. 노인분들과 장기 거주자들은 엄두도 낼 수 없는 값비싼 아파트들이 올라가고 있고 이는 우리 이웃 지역의 노숙자 증가를 야기하기도 하는데, 너무 많은 사람들 - 자식들 먹여 살리기 위해 등골이 휘어 가며 살아왔던 어르신들의 바로 그 자녀들-은 투표 하나가 무슨 변화를 만들겠냐고 생각하며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 할머니 한 분은 자신의 한 표가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 믿으며 굽은 허리로 투표를 하러 나오셨습니다.
정치에 있어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주목 받지 못한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인데다, 우리 민족은 다른 민족과 달리 정치적으로 덜 관여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David 선생님은 이런 점에 대해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보시나요?
한국에 계신 위안부 할머니들이 많이 돌아가시고 이제 몇 분 안 남았다는걸 알고 계시나요? 모두 다 돌아가시면 누가 그 분들을 위해서 싸워줄 것인가요? 저희 부모님이 미국으로 이민 오셨을 때 그분들의 마음은 조용하게, 문제를 일으키지 말고, 그냥 묵묵히 일하고 또 일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계 미국인들도 마치 부모님들 세대처럼 우리 자신을 위해서 싸울줄 몰라요. 글쎄요, 그러는게 불편해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요. 하지만 제가 하나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은, 다른 소수 민족들은 투쟁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모으고 자신들을 위해 투쟁하는 법을 알고 있어요. 한국 사회는 너무 오랫동안 수동적으로 있었어요. 우리도 이제 힘을 모아 우리 스스로를 지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부모님과 우리 자신에게 폐를 끼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아직 너무 늦지 않았고, 우리는 지금 당장 행동에 나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언젠가 우리도 마찬가지로 우리 자녀들의 도움을 필요로 할 것이고, 우리 아이들은 자기의 부모님, 즉 우리들에게 보고 배운대로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다음 세대에도 지속될 명예로운 유산을 남기고자 한다면, 우리부터 오늘 당장 우리 부모님을 공경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아직도 제가 26살이었을 때가 기억나네요. 발렌타인데이 주말이었는데 저는 저녁 7시 반에 도서관을 청소하고 있었어요. 제가 그때 이런 생각을 했었어요, “아 참, 나는 싱글 남자인데. 지금 나가서 연애를 하고 있어야 되는데 지금 이 밤에 청소를 하고 있네". 그때 조금 슬펐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말이죠, 이제는 AVID 선생님으로서 가장 기분 좋은게 언제냐 하면 주차장을 나가면서 AVID 티셔츠를 입고 집에가는 학생을 볼 때예요. 저 학생은 이 프로그램 때문에 자기가 대학을 간다고 믿잖아요. 그 덕분에 저는 미소를 짓게 됩니다. 지난 18년 동안 우리 AVID 학생을 4년제 대학으로 보내는 확률은 꾸준히 97%에요.
참 대단하네요. 아직도 그 프로그램을 위해 일하고 계시나요?
제가 이제 프로그램 코디네이터는 아니지만 저는 AVID 입시생과 함께 대학교 입학 지원서와 에세이를 도와주는 AVID 선생 중 한명이에요. 우리는 최근에 여름마다 6주 동안 하는 AVID 여름 학교 수업을 마쳤어요. 여름 학교는 아침 8시에 시작하는데 저는 아침 7-8시 사이에 AVID 입시생과 일대일로 만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엇에 관해 글을 써야할지 모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저는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그들과 같이 앉아서 간단한 질문지를 작성하게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 신중하게 탐색을 하면서 그들의 아이디어를 끌어낼 수 있게 됩니다. 학생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찾도록 도와주는 것은 굉장히 보람있는 경험이에요. 많은 학생들이 자기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엔 감정에 복받쳐서 울어요. 제가 이 학생들의 인생에서 중요한 시간을 함께 한다는 것이 교사로서 정말 보람이 있습니다.
David님의 헌신적인 모습이 존경스럽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선생님과 같은 생각을 갖게 만드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런 일에 좌절감을 느낀적이 있나요?
몇 년 전에 저의 좋은 친구, 그레이스 유(Grace Yoo)가 시의회에 출마했어요. 선거 날에 제가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할머니들은 투표소로 운전하여 모셔다 드리느라 일을 하루 못 갔어요. 할머니들이 우리를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어요. 그 할머니들은 한국계 미국인이 출마했다는 것 외에는 그 투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셨어요. 투표용지에 유 후보가 몇 번인지만 알고서 나오셨어요. 한 할머니를 모시러 갔을 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데, 말 그대로 90도로 허리가 굽으셨는데도 여전히 투표를 하기 위해 나오고 계셨어요. 할머니는 우리와 아이들을 위해 나오셨어요. 사회보장과 복지 수표를 받아 사시는 할머니들께서 투표하러 나오신 이유는 오로지 여기 미국에 있는 차세대 한국인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 이 할머니들이 투표의 결과로 그들의 삶이 바뀔 것이라 믿으셨을까요? 그 분들은 우리를 위해 투표하러 나오신거에요! 제 마음을 정말 아프게 한 것은 많은 친구들이 투표에 참여하지 않은 지역에 살고 있었고, 그들은 단지 저소득층과 노인 주택의 부족과 같은 문제가 당장 자기에게 개인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근 지역은 선거구가 이해관계에 따라 이리저리 변경이 되는 경향이 높기 때문에 코리아타운에서 투표권을 많이 얻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시의회는 어떤 방식으로도 우리 지역사회에 도움이 되어주지 못할거에요. 우리야말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싸워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자녀들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우리의 어르신들 처럼요. 하지만 많은 젊은이들이 이런 문제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요. 노인분들과 장기 거주자들은 엄두도 낼 수 없는 값비싼 아파트들이 올라가고 있고 이는 우리 이웃 지역의 노숙자 증가를 야기하기도 하는데, 너무 많은 사람들 - 자식들 먹여 살리기 위해 등골이 휘어 가며 살아왔던 어르신들의 바로 그 자녀들-은 투표 하나가 무슨 변화를 만들겠냐고 생각하며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 할머니 한 분은 자신의 한 표가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 믿으며 굽은 허리로 투표를 하러 나오셨습니다.
정치에 있어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주목 받지 못한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인데다, 우리 민족은 다른 민족과 달리 정치적으로 덜 관여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David 선생님은 이런 점에 대해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보시나요?
한국에 계신 위안부 할머니들이 많이 돌아가시고 이제 몇 분 안 남았다는걸 알고 계시나요? 모두 다 돌아가시면 누가 그 분들을 위해서 싸워줄 것인가요? 저희 부모님이 미국으로 이민 오셨을 때 그분들의 마음은 조용하게, 문제를 일으키지 말고, 그냥 묵묵히 일하고 또 일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계 미국인들도 마치 부모님들 세대처럼 우리 자신을 위해서 싸울줄 몰라요. 글쎄요, 그러는게 불편해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요. 하지만 제가 하나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은, 다른 소수 민족들은 투쟁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모으고 자신들을 위해 투쟁하는 법을 알고 있어요. 한국 사회는 너무 오랫동안 수동적으로 있었어요. 우리도 이제 힘을 모아 우리 스스로를 지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부모님과 우리 자신에게 폐를 끼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아직 너무 늦지 않았고, 우리는 지금 당장 행동에 나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언젠가 우리도 마찬가지로 우리 자녀들의 도움을 필요로 할 것이고, 우리 아이들은 자기의 부모님, 즉 우리들에게 보고 배운대로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다음 세대에도 지속될 명예로운 유산을 남기고자 한다면, 우리부터 오늘 당장 우리 부모님을 공경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