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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짐림
배우
팀 짐 림은 노스 할리우드에 기반을 두고 활동하는 배우, 댄서, 가수 및 스턴트 연기자입니다. 그는 한국인이지만 중국에서 선교사의 자녀로 자랐으며 미국 시민입니다. 그는 주로 카니발, World of Dance LA / SD, Urban Street Jam 및 LA Unbound를 포함한 뮤지컬 극장 및 댄스 쇼를 공연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해외에서 사신걸로 알고 있는데, 해외에서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 해주시겠습니까?
제가 4살 쯤 되었을 때 부모님과 함께 중국으로 이사했고 중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3학년 때 부모님의 안식년이어서 한 해 동안 Pasadena로 이사와 살았던 것 외에는 고등학교를 졸업 할 때까지 중국에서 살았습니다.
부모님이 선교사이시죠?
네, 그렇습니다. 지금은 캄보디아에 계십니다.
중국에서 사는 것은 어떠셨나요?
재미있었어요. 오랫동안 제가 아는 세상은 이게 전부였죠. 그래서 어디에다 비교할만한 것들이 별로 없네요. 그래도 매년 여름마다 해외를 돌아다녔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가거나 이곳 캘리포니아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어머니 쪽의 사촌들도 러시아에서 선교사로 있었기에 비슷한 생활환경에서 자랐는데, 아버지 쪽 사촌들은 남가주에서 평생 살았어요. 그래서 미국에 돌아오면 뭔가 다른 느낌을 받았죠. 당시에는 제가 어디 출신인지에 대한 의식이 더 컸던 것 같아요. (중국에는) 저와 외모는 닮았지만 실제로는 다른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렇다고 외모 때문에 다른 취급을 받은 적은 없었어요. 하지만 사람들이 저의 부모님이 한국에서 왔다거나 제가 미국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뭔가 달라지기 시작했죠. 그런 반응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오히려 제가 어렵게 느꼈던 부분은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을 넘어 어떤 정체성을 가질지를 선택해야 했던 것이었어요. 매번 “나는 한국에서 태어난 미국인인데 지금은 중국에서 살고 있어"라고 설명하는 것이 벅찼거든요. 저는 2년 동안 홈스쿨링을 했고, Northstar도 했고, 국제학교도 다녔었어요. 국제학교는 짧게 다니다가 나가는 학생들도 많고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학생들도 많은 그런 생활 환경이었기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저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미국에 돌아와 학교를 다니는 것이 비교적 쉽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미국으로 돌아와 사는 것이 문화적으로 충격을 주지는 않았지만, 제가 이곳에서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감각에 대해서는 완전히 새로 배워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친구들이 당신이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것을 알기 시작했을 때, 그 관계는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별로 큰 변화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국제 학교의 환경은 모든 사람이 각기 다른 곳에서 오기 때문에 올 수 있기 때문에 백인인 사람, 미국에서 온 사람, 덴마크에서 온 사람 또는 스웨덴에서 온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두들 “멋지다! 그곳은 어떤 곳인지 이야기 해 줘!” 또는 “너희 나라의 문화에 대해 알려줘” 라는 반응이에요. 매년 학기마다 ‘국제의 날'을 열어서 각 학년마다 한 국가씩 배정을 하고 그 나라의 음식을 만들고 그 나라 문화와 관련된 게임이나 활동도 하면서 전체 학교가 큰 박람회처럼 행사를 했어요. 그래서 더 매력적이었던 것 같아요. 중국에는 국제적인 커뮤니티가 많고 특히 한국인들이 대부분인 국제학교들도 많은데, 이와 달리 저희 학교는 다양한 출신들이 비슷한 비중으로 있어서인지 사람들이 제가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에도 별다른 반응 없이 그냥 “아 그렇구나" 하고 말았어요.
어린 시절에 그런 다양성을 경험한 것이 본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에 어떻게 도움이 되었나요?
저의 경험이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다른 점을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있던 환경에서는 어느 누구도 저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 없었기에 저는 저의 경험을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소수자 또는 기득권층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곳에 사는 사람들이 가졌을 질문보다 더 많이 더 자주 제 스스로에게 질문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이 저로하여금 어릴 때부터 정체성에 관한 인식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이 되었고, 그래서 나중에 이런 주제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조금 더 쉬워졌던 것 같습니다.
아까 인터뷰에서 ‘중국에 사는 한국계 미국인'이라고 언급하셨는데요. 당신의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고려할 때 그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저는 때때로 제가 무언가를 선택을 해야한다고 느꼈습니다. 고등학교가 끝날 무렵에 부모님과 저는 부모님의 역할에 관한 저의 의견과 저의 미래 진로에 관한 생각을 이야기 하다가 자주 다투었습니다. 부모님은 저에게 “그건 너무 미국적이야! 너는 정말 미국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구나!”라거나 “너를 한국 학교나 중국 학교로 보냈어야 했어!”라고 말씀하시곤 했어요. 그러면 저는 “부모님이 저를 이렇게 만드신 거에요! 제 선택이 아니었어요.” 라고 대답했죠. 대학에 가면 절대 아무것도 한국과 관련된 것은 안 할 것이라고 다짐한 것이 제가 한 반항이었습니다. 한국 음식도 안 먹고 한국말도 하지 않았어요. 다른 사람들의 반항에 비하면 순한 편이지만 어쨌든 그것은 제 나름대로의 반항이었습니다. 제가 그러고 있는 동안 부모님은 한국적인 것을 더 밀어붙이셨고, 저는 “NO!!!” 였습니다. 미국인이면서 민족적으로는 한국인이라는 것은 이런 밀당과 같았습니다. 만약 미국인이라는게 백인만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저는 어떤 노력을 해도 미국인이 될 수 없자나요. 그렇다면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한국계’와 ‘미국인'이 서로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요? 이것에 대해 저는 항상 고민해왔고 우리 모두가 아직도 고민하고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학생활을 하는 동안 한국적인 면을 밀어내려고 했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다시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나요?
사실 제가 이곳으로 돌아온 다음에 더 한국적인 면모를 받아들이게 된 것 같고, 솔직히 3년 전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어요. 할리우드와 같은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다양성이나 아시안 경험에 관한 대화들이 많지만, 한국인이 자주 배제되기 때문에 참여하기가 어려웠었습니다. 이를테면 일본의 미디어는 아시아의 여러 지역에 널리 퍼져 있고 여기에서는 애니메이션의 인기가 높죠. 잭키 챈(Jackie Chan)과 제트 리(Jet Li)가 출연하는 홍콩 영화도 매우 유명하지만 한국의 것은 거의 없었어요. 최근에야 비로소 K-pop이 들어오기 시작했죠. 여기에다 필리핀이나 인도까지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훨씬 더 커집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완전히 다른 대화가 되어서, 제가 이 업계에서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저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깊이 탐구하기 시작했을 때, 그때야 비로소 그 의미를 제가 소중하게 받아들여야 하고, 받아들이고 싶은 것이라는 점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제가 보다 깊은 관심을 갖고 알아보기 시작한 시점은 제 주변 사람들이 아시아계 미국인의 정체성에 관한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부터였어요. 에리카 리(Erica Lee)라는 분이 쓰신 “Making of Asian America”라는 책이 있는데, 각기 다른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이 어떻게 미국에서 살게 되었는지를 상세하게 담고 있는 굉장히 촘촘한 역사책이에요. 그 당시에 있었던 일과 인종간 긴장감에 관한 부분을 읽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화가 났죠 (웃음). 이 책을 접한 것이 저로 하여금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게 하였고 그것에 다시 연결되도록 해준 것 같아요. 제가 순수 한국인은 아닐지라도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감당해야하는 면모들이 있으니까요.
대부분 한국의 어르신 세대는 의사, 변호사 또는 엔지니어가되는 것을 “성공"으로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이 창의적인 분야를 추구하고 미디어 제작 공부를 하도록 영감을 준 것은 무엇이었나요?
저는 어릴 때부터 이야기 하는 것을 항상 좋아했습니다. 주일 학교에서 저는 항상 “제가 이야기 해볼래요!”라고 했고, 공연이 있을 때마다 오디션을 보고 싶어했습니다.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해준다는 아이디어는 제가 항상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고, 저는 항상 미디어에 참여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저는 비디오 게임도 엄청 많이 하고 영화와 TV 쇼도 정말 많이 보았는데, 무엇보다도 저를 매료시킨 것은 미디어는 청중들에게 무언가를 느끼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다른 것들, 특히 SAT 같은 것은 잘 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의사를 했다면 엉망이었을 것 같아요. 변호사를 했으면 잘했을 것 같지만, 그때 당시에는 내가 영화를 만드는 일을 할 수 있는데 왜 변호사를 해야하나 하고 생각했어요. 개인적으로 제가 원했던 것은 부모님이 원하셨던 다른 직업들과 맞지 않았습니다. 제가 미디어를 더 배우게 될 수록, 사실 많은 분들이 - 특히 어르신들 세대에서 - 여전히 과소평가되고 있는 미디어의 힘을 점점 더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문화와 인물과 이슈들이 어떤 관점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에 관하여 미디어가 얼마나 연관되어 있는지를 사람들은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부모님께서 당신이 좇던 진로를 지지해 주셨나요?
사실 그렇진 않았어요. 부모님께서는 저에게 영화쪽으로 가고 싶다면 누나와 같은 학교로 가야한다고 하셔서 결국 누나가 다니고 있던 캘빈 대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솔직히 부모님은 제 꿈이 오래가지 않을거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저의 할머니도 "그래서 그 영화 뭐시기 하는게 언제 끝난다고?"라고 말씀하셨었고 저는 "할머니, 영화 만드는 건 그냥 ‘뭐시기'가 아니에요"라고 대답하곤 했죠. 아무래도 그분들은 제가 불편하거나 불안함을 조성할 수 있는 화제를 다루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셨던 것 같기도 해요. 제가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뮤지컬을 하고 있을 때에도 그분들은 당신들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그 주제는 요즘 아주 큰 이슈이니까 조심해서 다뤄야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제가 알았다고 말씀을 드려도 여전히 불안해 하셨죠. 그럴 때마다 저는 “더 큰 그림을 보세요!” 라고 말씀드리곤 했습니다.
우리는 아시아계 미국인의 미디어 노출이 기대만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시안이기 때문에 불이익을 받거나 반대로 이익을 얻었던 경험이 있나요?
확실히 어렵죠. 한동안 저는 배우가 되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더 유명한 아시아계 미국인 배우들과 대화를 해보면 그들도 맡을 수 있는 배역이 거의 없기 때문에 오디션 룸에서 서로 자주 마주치게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아시아 인’ 이라는 용어는 너무 느슨하게 정의되어 있어서 제가 오디션을 보러 갔을 때 “당신은 우리가 찾는 아시아인이 아닙니다"라는 말을 듣기도 했어요. 생각해보니 제가 한국인 배역을 맡아 본 적이 한번도 없었던 것 같아요. 이 위안부 뮤지컬에서 조차도 저의 배역은 한국인이 아닙니다. 점차 다양성을 표명하는 환경이 되어가고는 있지만 그들이 아시아 경험이나 이야기들을 찾으려 할 때 거기에 반드시 한국적인 것들이 포함되는 것 같지는 않아요. 그건 아마 아직 사람들이 그런 얘기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Crazy Rich Asians, 마블의 새로운 아시아 슈퍼 히어로, Kim's Convenience와 Assassins과 같은 작품의 성공으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아직 갈 길이 멀지만 다양성에 대한 정의와 아시아 경험에 대해서 사람들이 부여하는 가치를 생각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위안부에 관한 뮤지컬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작품처럼 예민하면서도 중요한 주제를 다루는 작품에 참여하는 것은 어떤가요?
확실히 감정적으로 됩니다. 출연진들 모두 우리가 하는 일의 무게를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월급만 보고 여기 온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무대 위 영광을 얻기 위해 온 사람도 없죠. 우리는 위안부였던 피해자 분들의 하지 못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습니다.
그 작품이 배우로서의 본인에게 어떤 도전을 주었나요?
제 역할은 뮤지컬 시작 부분에 모든 여성들을 데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조금 이상하죠. 저는 이야기를 진행하기 위해 필요한 장치 같은 역할이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있어서 멋진 경험은 무대에서 그 여성분들과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위안부 역을 맡아 연기하는 모든 사람들은 매일 밤마다 마음과 영혼을 무대에 쏟아 붓습니다. 그런 그분들의 모습을 보면서 어떤 때는 제가 그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플롯 장치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져서 힘들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은 실제 일어난 일을 다룹니다. 이것이 실제 사람들에게 일어났던 일이라는 것을 아는 것도 고통스럽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분들이 남기고 가신 것들이 계속해서 전해질 수 있도록 확실하게 보전하는 것입니다. 등장인물 중 하나는 3일 전 세상을 떠나신 피해 생존자 분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 분께서 돌아가신 다음 날, 그녀의 역할을 맡았던 한 배우는 커튼콜을 하는 동안 그 소식을 전했고 우리 모두의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제가 이 뮤지컬을 하기 전까지는 이런 이야기를 모르고 있었다는 것도 저를 매우 슬프게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수행한 프로젝트 중 가장 만족스럽거나 가장 좋아하는 프로젝트는 무엇입니까?
제가 아직 다 만들지 못한 작품이 하나 있습니다. 대본 읽기 정도만 해본 상태에요. 처음에는 제 자신을 위한 치유적 반영의 모습으로 만들기 시작했는데, 하다보니 이것은 세상에 전해야 할 이야기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대본 읽기를 마친 후 배역의 연령대에 맞는 배우들을 섭외했고, 그분들이 이 주제와 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보는 것은 정말로 좋았습니다. 마침내 누군가가 저를 대변해주는 것 같았거든요. 이 프로젝트가 이만큼 진전이 있었다는 것만으로 꽤 만족스럽습니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계속해서 이 일을 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그 프로젝트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 해 주실 수 있나요?
약간 가족 드라마 같지만 주인공이 뮤지션이기 때문에 음악적인 요소도 가지고 있습니다. 영화 ‘원스’를 보셨다면 아실 것 같은데, 사람들이 갑자기 나와서 노래 부르고 춤 추는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작품 맥락에 따라 전반적으로 음악이 뿌려져 있는 그런 느낌이에요. 굉장히 인디영화 같아요. 사실 수백만 달러를 쓸 것도 아니고 좀더 현실적으로 만들고 싶어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작품을 썼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점점 생기고 있다고 느껴져요. 이런 이야기들이 좀 더 알려지고 아시아인에 대한 편견이 없어질 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용감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행운을 빌고 있어요!
프로젝트를 통해 달성하고 싶은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가요?
저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람들이 인간애를 더 확장하도록 도움이 되는 콘텐츠와 예술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현재 정말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만 사람들이 점점 더 무감각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국경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듣거나 홍콩에서 일어나는 시위나 그에 관한 사람들의 반응을 볼 때, 사람들이 공감하는 정도가 상당히 줄었다고 생각됩니다. 사람들이 공감과 연민의 마음을 다시 살리는 데에 제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앞으로의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질 것 같아요.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일을 시작하는 젊은 시절의 본인 또는 아시아계 미국인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나요?
제가 과거의 나 자신에게 조언을 해줄 수 있다면, 대학 시절을 낭비하지 말라고 이야기 해 주고 싶어요. 제가 대학에서 한 일들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그 시간들을 좀더 유용하게 쓸 수 있었다고 생각하기에 ‘낭비'라고 표현할게요. 제가 한 학기를 일찍 마친 것은 조금 후회되는 것 같아요. 하지만 만약 당신에게 쓸 수 있는 리소스가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쓰세요. 다른 아시아계 미국인 영화제작자나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일하는 분들께 생각에 도움을 드리는 차원에서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당신들의 이야기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해도 상관 없어요. 당신의 이야기에는 누군가를 움직일 수 있는 무게와 힘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자체로 가치가 있습니다. 비록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알려져 있더라도, 그 자체로 당신이 예술가로서 갖고 있는 힘과 당신에 관하여 무언가를 얘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종사하는 누구에게도, 특히 소외된 커뮤니티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쉬운 길이 아니지만, 계속 도전하세요. 이 얘기는 아시안 영화제작자 분들에게만 하는 얘기는 아닙니다만, 지금 정말 많은 그룹의 사람들이 극도로 침묵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할 수 있도록 용기를 모으는 것조차 너무 힘들지만, 당신이 그 이야기를 기꺼이 나누고자 한다면 사람들은 들을 것입니다.
제가 4살 쯤 되었을 때 부모님과 함께 중국으로 이사했고 중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3학년 때 부모님의 안식년이어서 한 해 동안 Pasadena로 이사와 살았던 것 외에는 고등학교를 졸업 할 때까지 중국에서 살았습니다.
부모님이 선교사이시죠?
네, 그렇습니다. 지금은 캄보디아에 계십니다.
중국에서 사는 것은 어떠셨나요?
재미있었어요. 오랫동안 제가 아는 세상은 이게 전부였죠. 그래서 어디에다 비교할만한 것들이 별로 없네요. 그래도 매년 여름마다 해외를 돌아다녔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가거나 이곳 캘리포니아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어머니 쪽의 사촌들도 러시아에서 선교사로 있었기에 비슷한 생활환경에서 자랐는데, 아버지 쪽 사촌들은 남가주에서 평생 살았어요. 그래서 미국에 돌아오면 뭔가 다른 느낌을 받았죠. 당시에는 제가 어디 출신인지에 대한 의식이 더 컸던 것 같아요. (중국에는) 저와 외모는 닮았지만 실제로는 다른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렇다고 외모 때문에 다른 취급을 받은 적은 없었어요. 하지만 사람들이 저의 부모님이 한국에서 왔다거나 제가 미국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뭔가 달라지기 시작했죠. 그런 반응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오히려 제가 어렵게 느꼈던 부분은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을 넘어 어떤 정체성을 가질지를 선택해야 했던 것이었어요. 매번 “나는 한국에서 태어난 미국인인데 지금은 중국에서 살고 있어"라고 설명하는 것이 벅찼거든요. 저는 2년 동안 홈스쿨링을 했고, Northstar도 했고, 국제학교도 다녔었어요. 국제학교는 짧게 다니다가 나가는 학생들도 많고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학생들도 많은 그런 생활 환경이었기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저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미국에 돌아와 학교를 다니는 것이 비교적 쉽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미국으로 돌아와 사는 것이 문화적으로 충격을 주지는 않았지만, 제가 이곳에서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감각에 대해서는 완전히 새로 배워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친구들이 당신이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것을 알기 시작했을 때, 그 관계는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별로 큰 변화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국제 학교의 환경은 모든 사람이 각기 다른 곳에서 오기 때문에 올 수 있기 때문에 백인인 사람, 미국에서 온 사람, 덴마크에서 온 사람 또는 스웨덴에서 온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두들 “멋지다! 그곳은 어떤 곳인지 이야기 해 줘!” 또는 “너희 나라의 문화에 대해 알려줘” 라는 반응이에요. 매년 학기마다 ‘국제의 날'을 열어서 각 학년마다 한 국가씩 배정을 하고 그 나라의 음식을 만들고 그 나라 문화와 관련된 게임이나 활동도 하면서 전체 학교가 큰 박람회처럼 행사를 했어요. 그래서 더 매력적이었던 것 같아요. 중국에는 국제적인 커뮤니티가 많고 특히 한국인들이 대부분인 국제학교들도 많은데, 이와 달리 저희 학교는 다양한 출신들이 비슷한 비중으로 있어서인지 사람들이 제가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에도 별다른 반응 없이 그냥 “아 그렇구나" 하고 말았어요.
어린 시절에 그런 다양성을 경험한 것이 본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에 어떻게 도움이 되었나요?
저의 경험이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다른 점을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있던 환경에서는 어느 누구도 저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 없었기에 저는 저의 경험을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소수자 또는 기득권층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곳에 사는 사람들이 가졌을 질문보다 더 많이 더 자주 제 스스로에게 질문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이 저로하여금 어릴 때부터 정체성에 관한 인식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이 되었고, 그래서 나중에 이런 주제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조금 더 쉬워졌던 것 같습니다.
아까 인터뷰에서 ‘중국에 사는 한국계 미국인'이라고 언급하셨는데요. 당신의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고려할 때 그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저는 때때로 제가 무언가를 선택을 해야한다고 느꼈습니다. 고등학교가 끝날 무렵에 부모님과 저는 부모님의 역할에 관한 저의 의견과 저의 미래 진로에 관한 생각을 이야기 하다가 자주 다투었습니다. 부모님은 저에게 “그건 너무 미국적이야! 너는 정말 미국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구나!”라거나 “너를 한국 학교나 중국 학교로 보냈어야 했어!”라고 말씀하시곤 했어요. 그러면 저는 “부모님이 저를 이렇게 만드신 거에요! 제 선택이 아니었어요.” 라고 대답했죠. 대학에 가면 절대 아무것도 한국과 관련된 것은 안 할 것이라고 다짐한 것이 제가 한 반항이었습니다. 한국 음식도 안 먹고 한국말도 하지 않았어요. 다른 사람들의 반항에 비하면 순한 편이지만 어쨌든 그것은 제 나름대로의 반항이었습니다. 제가 그러고 있는 동안 부모님은 한국적인 것을 더 밀어붙이셨고, 저는 “NO!!!” 였습니다. 미국인이면서 민족적으로는 한국인이라는 것은 이런 밀당과 같았습니다. 만약 미국인이라는게 백인만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저는 어떤 노력을 해도 미국인이 될 수 없자나요. 그렇다면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한국계’와 ‘미국인'이 서로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요? 이것에 대해 저는 항상 고민해왔고 우리 모두가 아직도 고민하고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학생활을 하는 동안 한국적인 면을 밀어내려고 했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다시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나요?
사실 제가 이곳으로 돌아온 다음에 더 한국적인 면모를 받아들이게 된 것 같고, 솔직히 3년 전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어요. 할리우드와 같은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다양성이나 아시안 경험에 관한 대화들이 많지만, 한국인이 자주 배제되기 때문에 참여하기가 어려웠었습니다. 이를테면 일본의 미디어는 아시아의 여러 지역에 널리 퍼져 있고 여기에서는 애니메이션의 인기가 높죠. 잭키 챈(Jackie Chan)과 제트 리(Jet Li)가 출연하는 홍콩 영화도 매우 유명하지만 한국의 것은 거의 없었어요. 최근에야 비로소 K-pop이 들어오기 시작했죠. 여기에다 필리핀이나 인도까지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훨씬 더 커집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완전히 다른 대화가 되어서, 제가 이 업계에서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저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깊이 탐구하기 시작했을 때, 그때야 비로소 그 의미를 제가 소중하게 받아들여야 하고, 받아들이고 싶은 것이라는 점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제가 보다 깊은 관심을 갖고 알아보기 시작한 시점은 제 주변 사람들이 아시아계 미국인의 정체성에 관한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부터였어요. 에리카 리(Erica Lee)라는 분이 쓰신 “Making of Asian America”라는 책이 있는데, 각기 다른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이 어떻게 미국에서 살게 되었는지를 상세하게 담고 있는 굉장히 촘촘한 역사책이에요. 그 당시에 있었던 일과 인종간 긴장감에 관한 부분을 읽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화가 났죠 (웃음). 이 책을 접한 것이 저로 하여금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게 하였고 그것에 다시 연결되도록 해준 것 같아요. 제가 순수 한국인은 아닐지라도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감당해야하는 면모들이 있으니까요.
대부분 한국의 어르신 세대는 의사, 변호사 또는 엔지니어가되는 것을 “성공"으로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이 창의적인 분야를 추구하고 미디어 제작 공부를 하도록 영감을 준 것은 무엇이었나요?
저는 어릴 때부터 이야기 하는 것을 항상 좋아했습니다. 주일 학교에서 저는 항상 “제가 이야기 해볼래요!”라고 했고, 공연이 있을 때마다 오디션을 보고 싶어했습니다.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해준다는 아이디어는 제가 항상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고, 저는 항상 미디어에 참여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저는 비디오 게임도 엄청 많이 하고 영화와 TV 쇼도 정말 많이 보았는데, 무엇보다도 저를 매료시킨 것은 미디어는 청중들에게 무언가를 느끼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다른 것들, 특히 SAT 같은 것은 잘 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의사를 했다면 엉망이었을 것 같아요. 변호사를 했으면 잘했을 것 같지만, 그때 당시에는 내가 영화를 만드는 일을 할 수 있는데 왜 변호사를 해야하나 하고 생각했어요. 개인적으로 제가 원했던 것은 부모님이 원하셨던 다른 직업들과 맞지 않았습니다. 제가 미디어를 더 배우게 될 수록, 사실 많은 분들이 - 특히 어르신들 세대에서 - 여전히 과소평가되고 있는 미디어의 힘을 점점 더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문화와 인물과 이슈들이 어떤 관점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에 관하여 미디어가 얼마나 연관되어 있는지를 사람들은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부모님께서 당신이 좇던 진로를 지지해 주셨나요?
사실 그렇진 않았어요. 부모님께서는 저에게 영화쪽으로 가고 싶다면 누나와 같은 학교로 가야한다고 하셔서 결국 누나가 다니고 있던 캘빈 대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솔직히 부모님은 제 꿈이 오래가지 않을거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저의 할머니도 "그래서 그 영화 뭐시기 하는게 언제 끝난다고?"라고 말씀하셨었고 저는 "할머니, 영화 만드는 건 그냥 ‘뭐시기'가 아니에요"라고 대답하곤 했죠. 아무래도 그분들은 제가 불편하거나 불안함을 조성할 수 있는 화제를 다루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셨던 것 같기도 해요. 제가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뮤지컬을 하고 있을 때에도 그분들은 당신들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그 주제는 요즘 아주 큰 이슈이니까 조심해서 다뤄야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제가 알았다고 말씀을 드려도 여전히 불안해 하셨죠. 그럴 때마다 저는 “더 큰 그림을 보세요!” 라고 말씀드리곤 했습니다.
우리는 아시아계 미국인의 미디어 노출이 기대만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시안이기 때문에 불이익을 받거나 반대로 이익을 얻었던 경험이 있나요?
확실히 어렵죠. 한동안 저는 배우가 되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더 유명한 아시아계 미국인 배우들과 대화를 해보면 그들도 맡을 수 있는 배역이 거의 없기 때문에 오디션 룸에서 서로 자주 마주치게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아시아 인’ 이라는 용어는 너무 느슨하게 정의되어 있어서 제가 오디션을 보러 갔을 때 “당신은 우리가 찾는 아시아인이 아닙니다"라는 말을 듣기도 했어요. 생각해보니 제가 한국인 배역을 맡아 본 적이 한번도 없었던 것 같아요. 이 위안부 뮤지컬에서 조차도 저의 배역은 한국인이 아닙니다. 점차 다양성을 표명하는 환경이 되어가고는 있지만 그들이 아시아 경험이나 이야기들을 찾으려 할 때 거기에 반드시 한국적인 것들이 포함되는 것 같지는 않아요. 그건 아마 아직 사람들이 그런 얘기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Crazy Rich Asians, 마블의 새로운 아시아 슈퍼 히어로, Kim's Convenience와 Assassins과 같은 작품의 성공으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아직 갈 길이 멀지만 다양성에 대한 정의와 아시아 경험에 대해서 사람들이 부여하는 가치를 생각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위안부에 관한 뮤지컬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작품처럼 예민하면서도 중요한 주제를 다루는 작품에 참여하는 것은 어떤가요?
확실히 감정적으로 됩니다. 출연진들 모두 우리가 하는 일의 무게를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월급만 보고 여기 온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무대 위 영광을 얻기 위해 온 사람도 없죠. 우리는 위안부였던 피해자 분들의 하지 못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습니다.
그 작품이 배우로서의 본인에게 어떤 도전을 주었나요?
제 역할은 뮤지컬 시작 부분에 모든 여성들을 데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조금 이상하죠. 저는 이야기를 진행하기 위해 필요한 장치 같은 역할이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있어서 멋진 경험은 무대에서 그 여성분들과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위안부 역을 맡아 연기하는 모든 사람들은 매일 밤마다 마음과 영혼을 무대에 쏟아 붓습니다. 그런 그분들의 모습을 보면서 어떤 때는 제가 그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플롯 장치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져서 힘들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은 실제 일어난 일을 다룹니다. 이것이 실제 사람들에게 일어났던 일이라는 것을 아는 것도 고통스럽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분들이 남기고 가신 것들이 계속해서 전해질 수 있도록 확실하게 보전하는 것입니다. 등장인물 중 하나는 3일 전 세상을 떠나신 피해 생존자 분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 분께서 돌아가신 다음 날, 그녀의 역할을 맡았던 한 배우는 커튼콜을 하는 동안 그 소식을 전했고 우리 모두의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제가 이 뮤지컬을 하기 전까지는 이런 이야기를 모르고 있었다는 것도 저를 매우 슬프게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수행한 프로젝트 중 가장 만족스럽거나 가장 좋아하는 프로젝트는 무엇입니까?
제가 아직 다 만들지 못한 작품이 하나 있습니다. 대본 읽기 정도만 해본 상태에요. 처음에는 제 자신을 위한 치유적 반영의 모습으로 만들기 시작했는데, 하다보니 이것은 세상에 전해야 할 이야기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대본 읽기를 마친 후 배역의 연령대에 맞는 배우들을 섭외했고, 그분들이 이 주제와 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보는 것은 정말로 좋았습니다. 마침내 누군가가 저를 대변해주는 것 같았거든요. 이 프로젝트가 이만큼 진전이 있었다는 것만으로 꽤 만족스럽습니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계속해서 이 일을 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그 프로젝트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 해 주실 수 있나요?
약간 가족 드라마 같지만 주인공이 뮤지션이기 때문에 음악적인 요소도 가지고 있습니다. 영화 ‘원스’를 보셨다면 아실 것 같은데, 사람들이 갑자기 나와서 노래 부르고 춤 추는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작품 맥락에 따라 전반적으로 음악이 뿌려져 있는 그런 느낌이에요. 굉장히 인디영화 같아요. 사실 수백만 달러를 쓸 것도 아니고 좀더 현실적으로 만들고 싶어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작품을 썼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점점 생기고 있다고 느껴져요. 이런 이야기들이 좀 더 알려지고 아시아인에 대한 편견이 없어질 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용감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행운을 빌고 있어요!
프로젝트를 통해 달성하고 싶은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가요?
저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람들이 인간애를 더 확장하도록 도움이 되는 콘텐츠와 예술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현재 정말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만 사람들이 점점 더 무감각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국경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듣거나 홍콩에서 일어나는 시위나 그에 관한 사람들의 반응을 볼 때, 사람들이 공감하는 정도가 상당히 줄었다고 생각됩니다. 사람들이 공감과 연민의 마음을 다시 살리는 데에 제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앞으로의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질 것 같아요.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일을 시작하는 젊은 시절의 본인 또는 아시아계 미국인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나요?
제가 과거의 나 자신에게 조언을 해줄 수 있다면, 대학 시절을 낭비하지 말라고 이야기 해 주고 싶어요. 제가 대학에서 한 일들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그 시간들을 좀더 유용하게 쓸 수 있었다고 생각하기에 ‘낭비'라고 표현할게요. 제가 한 학기를 일찍 마친 것은 조금 후회되는 것 같아요. 하지만 만약 당신에게 쓸 수 있는 리소스가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쓰세요. 다른 아시아계 미국인 영화제작자나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일하는 분들께 생각에 도움을 드리는 차원에서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당신들의 이야기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해도 상관 없어요. 당신의 이야기에는 누군가를 움직일 수 있는 무게와 힘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자체로 가치가 있습니다. 비록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알려져 있더라도, 그 자체로 당신이 예술가로서 갖고 있는 힘과 당신에 관하여 무언가를 얘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종사하는 누구에게도, 특히 소외된 커뮤니티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쉬운 길이 아니지만, 계속 도전하세요. 이 얘기는 아시안 영화제작자 분들에게만 하는 얘기는 아닙니다만, 지금 정말 많은 그룹의 사람들이 극도로 침묵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할 수 있도록 용기를 모으는 것조차 너무 힘들지만, 당신이 그 이야기를 기꺼이 나누고자 한다면 사람들은 들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