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nu
캐롤 박
"Memoirs of a Cashier” 저자
캐롤 박은 1980 년대와 1990 년대에 인종 간 갈등의 시기에 로스앤젤레스 카운티에서 자랐습니다. 이제 그녀는 당시와 현재 한인 사회에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그녀의 책 "계산원의 회고록(Memoirs of a Cashier)"은 캘리포니아 콤프턴에 있는 방탄 부스에서 계산원으로 일하면서 자라는 어린 소녀의 삶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캐롤은 그녀의 책에서 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 이후로 이어진 한인들의 경험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시작하자면, 우리는 미주 한인 이민자들의 이야기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가족 간의 차이도 매우 크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가족이 어떻게 미국으로 이민을 갔는지 그리고 어떻게 자랐는지에 대해 우리에게 좀 알려주시겠습니까?
네, 물론이죠. 저희 어머니와 아버지께서는 1965년 이민법이 통과된 후 1970년대 중반에 한국인들의 이민 물결이 일 때에 미국으로 오셨습니다. 한국 전쟁이 지난 이후에 미국에 올 수 있었다는 것과 여기에 있는 가족들에게 의지할 수 있었다는 것에서 혜택을 받았습니다. 어머니는 로스엔젤레스의 작은 바느질집에서 잠시 일하시다가 작은 아파트 단지에서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사랑은 사랑이에요! 두 분은 결혼을 했고 그리고 나서 저의 두 형과 내가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은 이민자의 바로 그 ‘아메리칸 드림’을 살고 계셨습니다. 이곳은 꿈의 땅, 약속의 땅이었고, 두 분은 작은 사업을 통해 그 꿈을 이루었습니다. 부모님은 사업과 가족, 모두를 가졌습니다. 우리는 풍족했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1990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말이죠. 그 후 저의 어머니는 다른 모습의 한인 이민자의 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 세 아이를 기르는 싱글맘의 삶을요.
이야기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당신의 한국계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으셨나요?
이러한 인종에 대한 개념은 오늘날 까지도 미국에서 논의되고 있습니다. 제가 그냥 한국인인가요? 한국 사람같이 생겼거든요. 저의 눈은 한국인처럼 보이지만, 저는 여기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미국인입니다. 전쟁 영웅이자 훌륭한 인도주의자였던 김영옥씨는 이곳 로스앤젤레스에서 많은 기관을 창시하였습니다. 그는 종종 “나는 100% 한국인이고 100% 미국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한국에 돌아갈 때마다 사람들은 저를 보고 "저 여자 좀 봐, 한국말도 못해"라고 말해요. 그래서 외면을 당해요. 미국과 한국, 두 나라 모두 저를 100%로 보지 않지만, 저는 제 자신을 각각 100%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적인 가치관을 따르고 한국적인 용어를 사용합니다. 저는 햄버거와 코카콜라를 먹고, 김치와 떡도 먹습니다. 그래서 저는 둘 다예요.
당신의 강한 정체성은 어렸을 때 싹트게 된 것인가요?
아니요! 저의 정체성은 한참 나중에 제가 엄마의 주유소에서 일하기 시작하기 전까진 그렇지 못했어요. ‘한국성’이라는 것이 얼굴을 내리치듯 크게 다가왔어요. 저는 인종 차별주의적인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칭크, 닢, 오리엔탈... 이것이 교육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렇게 불려지면서 도대체 내가 왜 그렇게 불리게 되었는지 궁금해졌어요. 그런 궁금증은 항상 저의 잠재의식 속에서 저를 괴롭혔지만, 훨씬 후에야 실제로 작동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제가 당신과 같이 그렇게 불려졌다면, 저는 아마도 저의 한국 정체성에서 멀어졌을 것 같은데요.
너무 화가 났었어요. 저는 이렇게 말했어요 “F*** you, 인종차별주의자가 될 거면 제대로 알고나 말해. 나는 한국인이야! 나를 차라리 “국”이라 불러. 난 일본인이 아니니까 잽이라고 부르지 마, 이놈들아!”. 사람들은 왜 한국인을 싫어할까요? 그들은 왜 우리를 소외시키려 하는 걸까요? 그들은 실제로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면서 왜 한 가지 방식으로만 생각할까요?
당신의 책들 중 많은 부분이 인종적 긴장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계산원으로 일하셨던 당시의 이야기나 사례들을 좀 말씀해 주시겠어요?
시간이 얼마나 남았죠? (웃음). 제가 90년대에 거기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 저는 10살이었어요. 폭동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991년 입니다. 당시 한인과 아프리카계 미국인 사이의 분쟁은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한국계 미국인들의 살인율은 1991년에 치솟았습니다. 손님들은 제 앞으로 걸어와서 "이 음료수 캔이 65센트일리가 없어! 이것은 45센트가 되어야 해!”라고 소리쳤어요. 제가 나이를 좀더 먹었을 땐, 그 말은 "이 빌어먹을 한국인들이 우리 돈을 몽땅 가져가고 있어. 당신들은 여기에 속하지 않아! 도대체 여기서 뭐하고 있는거야? F***** F******!”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면 저는 소리치곤 했죠, "너희도 마찬가지야! 그런 식으로 할거면 너희들도 똑같이 당해봐!”라고요. 이것은 올바른 방법이 아닙니다. 물론 지금은 이해합니다. 당시엔 일을 할 때마다 항상 어떤 싸움이 있었고 한번은 손님과 싸움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저를 욕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는 그에게 맞서서 말했습니다. "너 그거 알아? F***! 네가 뭔데 우리 엄마를 그렇게 불러?", “이 쪼그만 칭키********* 내가 널 베어버릴거야, 해칠거야.” 그러면 나는 "그래 해봐, 날 베고 싶어? 날 치고 싶어? 해봐!” 그것이 바로 그 당시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우고.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이가 좋지 않았어요.
당신의 경험으로 볼 때, 인종적 긴장이 서서히 고조되었나요 아니면 갑자기 폭발한 것 같은가요?
그것은 오랫동안 있었습니다. 이민법 이후에 한국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할 당시, 그들은 소외되었고 회사에 취업을 할 수도 없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주유소, 가발 가게, 주류 판매점과 같은 작은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가족이나 지역사회 구성원들에게 의지하여야 했습니다. 어디로 갈 수 있었을까요? 뉴욕의 플러싱, 시카고, 사우스 센트럴 로스엔젤레스와 같은 이민자들이 모여있는 곳으로요. 상상해보세요. 아프리카계 미국인 커뮤니티의 일원이 되는 것. 완전히 새로운 이민자들이 밀려 들어와서 50센트 대신 60센트를 청구하는 것 등을요. 당신은 화가 날거예요. 하지만 그렇다고 한국 사람들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그들은 회사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주유소를 사서 다른 주유소 등을 살 수 있을 때까지 열심히 일했습니다. 한국계 미국인들은 하위 계급이었고 지배 계급은 백인이었지요. 긴장은 점차 고조되었고, 로드니 킹의 무죄 판결로 촉발된 폭동이 일어나는 동안 폭발했어요. 모두가 거리로 나섰지만, 그들을 비난할 수 있나요? 그들은 학대와 억압을 당했습니다. 경찰들의 잔혹함, 지역사회에 대한 투자 부족,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었어요.
당신의 의견으로는, 인종 갈등을 해결하거나 제도화된 인종차별을 완화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입니까?
학문적인 관점에서, 우리는 당연히 교육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그리고 화합을 이루어 나가는 방법에 대하여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해요. 하지만 젊은 캐쉬어들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는 거리로 나가야 합니다. 학회에 참석해서 이런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할 수도 있지만,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라이브를 켜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학계와 사람들과 그들의 일상을 연결하는 것 말이에요. 다음 컨퍼런스에서는 소셜 미디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학문적인 용어를 이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양쪽이 다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람들과 대화하고 소통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통에 있어서의 문화적, 시간적 격차를 메우는 것이지요.
네, 물론이죠. 저희 어머니와 아버지께서는 1965년 이민법이 통과된 후 1970년대 중반에 한국인들의 이민 물결이 일 때에 미국으로 오셨습니다. 한국 전쟁이 지난 이후에 미국에 올 수 있었다는 것과 여기에 있는 가족들에게 의지할 수 있었다는 것에서 혜택을 받았습니다. 어머니는 로스엔젤레스의 작은 바느질집에서 잠시 일하시다가 작은 아파트 단지에서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사랑은 사랑이에요! 두 분은 결혼을 했고 그리고 나서 저의 두 형과 내가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은 이민자의 바로 그 ‘아메리칸 드림’을 살고 계셨습니다. 이곳은 꿈의 땅, 약속의 땅이었고, 두 분은 작은 사업을 통해 그 꿈을 이루었습니다. 부모님은 사업과 가족, 모두를 가졌습니다. 우리는 풍족했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1990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말이죠. 그 후 저의 어머니는 다른 모습의 한인 이민자의 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 세 아이를 기르는 싱글맘의 삶을요.
이야기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당신의 한국계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으셨나요?
이러한 인종에 대한 개념은 오늘날 까지도 미국에서 논의되고 있습니다. 제가 그냥 한국인인가요? 한국 사람같이 생겼거든요. 저의 눈은 한국인처럼 보이지만, 저는 여기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미국인입니다. 전쟁 영웅이자 훌륭한 인도주의자였던 김영옥씨는 이곳 로스앤젤레스에서 많은 기관을 창시하였습니다. 그는 종종 “나는 100% 한국인이고 100% 미국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한국에 돌아갈 때마다 사람들은 저를 보고 "저 여자 좀 봐, 한국말도 못해"라고 말해요. 그래서 외면을 당해요. 미국과 한국, 두 나라 모두 저를 100%로 보지 않지만, 저는 제 자신을 각각 100%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적인 가치관을 따르고 한국적인 용어를 사용합니다. 저는 햄버거와 코카콜라를 먹고, 김치와 떡도 먹습니다. 그래서 저는 둘 다예요.
당신의 강한 정체성은 어렸을 때 싹트게 된 것인가요?
아니요! 저의 정체성은 한참 나중에 제가 엄마의 주유소에서 일하기 시작하기 전까진 그렇지 못했어요. ‘한국성’이라는 것이 얼굴을 내리치듯 크게 다가왔어요. 저는 인종 차별주의적인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칭크, 닢, 오리엔탈... 이것이 교육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렇게 불려지면서 도대체 내가 왜 그렇게 불리게 되었는지 궁금해졌어요. 그런 궁금증은 항상 저의 잠재의식 속에서 저를 괴롭혔지만, 훨씬 후에야 실제로 작동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제가 당신과 같이 그렇게 불려졌다면, 저는 아마도 저의 한국 정체성에서 멀어졌을 것 같은데요.
너무 화가 났었어요. 저는 이렇게 말했어요 “F*** you, 인종차별주의자가 될 거면 제대로 알고나 말해. 나는 한국인이야! 나를 차라리 “국”이라 불러. 난 일본인이 아니니까 잽이라고 부르지 마, 이놈들아!”. 사람들은 왜 한국인을 싫어할까요? 그들은 왜 우리를 소외시키려 하는 걸까요? 그들은 실제로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면서 왜 한 가지 방식으로만 생각할까요?
당신의 책들 중 많은 부분이 인종적 긴장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계산원으로 일하셨던 당시의 이야기나 사례들을 좀 말씀해 주시겠어요?
시간이 얼마나 남았죠? (웃음). 제가 90년대에 거기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 저는 10살이었어요. 폭동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991년 입니다. 당시 한인과 아프리카계 미국인 사이의 분쟁은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한국계 미국인들의 살인율은 1991년에 치솟았습니다. 손님들은 제 앞으로 걸어와서 "이 음료수 캔이 65센트일리가 없어! 이것은 45센트가 되어야 해!”라고 소리쳤어요. 제가 나이를 좀더 먹었을 땐, 그 말은 "이 빌어먹을 한국인들이 우리 돈을 몽땅 가져가고 있어. 당신들은 여기에 속하지 않아! 도대체 여기서 뭐하고 있는거야? F***** F******!”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면 저는 소리치곤 했죠, "너희도 마찬가지야! 그런 식으로 할거면 너희들도 똑같이 당해봐!”라고요. 이것은 올바른 방법이 아닙니다. 물론 지금은 이해합니다. 당시엔 일을 할 때마다 항상 어떤 싸움이 있었고 한번은 손님과 싸움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저를 욕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는 그에게 맞서서 말했습니다. "너 그거 알아? F***! 네가 뭔데 우리 엄마를 그렇게 불러?", “이 쪼그만 칭키********* 내가 널 베어버릴거야, 해칠거야.” 그러면 나는 "그래 해봐, 날 베고 싶어? 날 치고 싶어? 해봐!” 그것이 바로 그 당시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우고.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이가 좋지 않았어요.
당신의 경험으로 볼 때, 인종적 긴장이 서서히 고조되었나요 아니면 갑자기 폭발한 것 같은가요?
그것은 오랫동안 있었습니다. 이민법 이후에 한국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할 당시, 그들은 소외되었고 회사에 취업을 할 수도 없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주유소, 가발 가게, 주류 판매점과 같은 작은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가족이나 지역사회 구성원들에게 의지하여야 했습니다. 어디로 갈 수 있었을까요? 뉴욕의 플러싱, 시카고, 사우스 센트럴 로스엔젤레스와 같은 이민자들이 모여있는 곳으로요. 상상해보세요. 아프리카계 미국인 커뮤니티의 일원이 되는 것. 완전히 새로운 이민자들이 밀려 들어와서 50센트 대신 60센트를 청구하는 것 등을요. 당신은 화가 날거예요. 하지만 그렇다고 한국 사람들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그들은 회사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주유소를 사서 다른 주유소 등을 살 수 있을 때까지 열심히 일했습니다. 한국계 미국인들은 하위 계급이었고 지배 계급은 백인이었지요. 긴장은 점차 고조되었고, 로드니 킹의 무죄 판결로 촉발된 폭동이 일어나는 동안 폭발했어요. 모두가 거리로 나섰지만, 그들을 비난할 수 있나요? 그들은 학대와 억압을 당했습니다. 경찰들의 잔혹함, 지역사회에 대한 투자 부족,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었어요.
당신의 의견으로는, 인종 갈등을 해결하거나 제도화된 인종차별을 완화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입니까?
학문적인 관점에서, 우리는 당연히 교육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그리고 화합을 이루어 나가는 방법에 대하여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해요. 하지만 젊은 캐쉬어들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는 거리로 나가야 합니다. 학회에 참석해서 이런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할 수도 있지만,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라이브를 켜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학계와 사람들과 그들의 일상을 연결하는 것 말이에요. 다음 컨퍼런스에서는 소셜 미디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학문적인 용어를 이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양쪽이 다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람들과 대화하고 소통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통에 있어서의 문화적, 시간적 격차를 메우는 것이지요.
네, 1992년 폭동과 같이 한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을 다루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엇이 당신에게 그 힘든 시기에 대한 회고록을 쓰게 했습니까?
테라피(심리치료)였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이런 이야기들을 해왔습니다. 그 이야기들은 제 피부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주유소에서 끔찍한 것들을 봤습니다. 어떤 남자가 오토바이에 치이고, 어떤 여자가 칼에 찔리고, 어떤 남자가 다른 사람에게 총을 쏘는 것도 보았어요. 저는 창의적인 글쓰기를 위해 대학원에 가려고 했습니다. 잘 알려진 작가였던 댄 스텔먼이 저에게 그런 것들에 대해 써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생각해보겠다고 대답했지만, 사실 그냥 저는 제 일을 하면서 학위를 따려고 하고 있었어요. 그때 UC 리버사이드에 한인 센터가 설립될 예정이라는 보도자료를 봤습니다. 저는 "허, 이거 흥미로운데. 센터로 연락해봐야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우연히 에드워드 장 교수가 연락을 받았습니다. 저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혹시 대학원생으로 들어가 함께 일할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는 "그래, 그래, 어서와"라고 말했어요. 그는 제가 폭동에 대해 글을 쓰도록 격려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폭동은 우리 사회에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글쓰기가 정말 힘들었어요. 사람들이 죽었고, 저도 죽을뻔 했죠. 누가 내 머리에 총을 겨눈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결국에는 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습니까? 폭동이 일어난 지 20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아직도 한국계 미국인의 역사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경험 중 하나가 무엇이었는지를 명확히 다루는 서적이 없어요. 당시 사람들은 그들의 부모와 형제자매들을 잃고 죽었습니다. 그래서 이 일을 이루어야만 했습니다. 수개월의 치료 후에, 이 책이 탄생했습니다. 심리치료와 정신 건강은 중요합니다. 그것이 이 책을 만들었습니다.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것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상상해 보세요.
1992년 폭동을 한국계 미국인의 관점 또는 한국계 미국인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여러 측면의 답을 드릴 수 있겠는데요. 개인적으로, 제가 꼽는 가장 큰 이유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잘못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랬어요 "당신들은 거기 없었잖아요. 못 봤잖아요! 그 긴장감이 어땠는지 모르시잖아요. 저쪽 길에 깨진 유리와 갈색 잔디가 있는 학교가 몇 년 동안 그랬다는 것을 여러분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지역사회에는 투자가 없었어요. 당신들은 이해하지 못할거에요!!”. 저는 약간 화가 났지만,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치료와 같았고 카타르시스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한국계 미국인의 관점이 말하여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제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폭동 중에 한국계 미국인들이 소외되고 버려졌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나는 단지 옥상에서 총을 들고 있는 그들을 보았을 뿐입니다."
제 책은 그분들을 악당이 아니라 자신의 가게를 지키는 정직한 사람들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장 교수님이 격려해 주셨고, 이 K.W.님을 비롯하여 여러 분들의 격려를 받았습니다. 그는 보석 같은 분입니다.
NCLC 시작할 때 본 동영상 클립에서 우리는 그가 많은 한국계 미국인들은 그때 없었고 실제로 갱단 멤버들이 우리 공동체를 보호했던 사람들 중 하나였다고 열정적으로 증언하는 동영상을 봤습니다. 동의하나요?
저는 한국인 친구가 없었어요. 저는 그 점에서 좀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저희 세대가 부모님 세대를 경험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KW의 말은 일리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제 학자가 되었기도 하고 사람들이 저에게 진지하게 말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학위를 따기 전에는 사람들이 제 말을 듣지 않았어요. 저는 그냥 화가 난 한국 소녀였을 뿐이었죠. 이제 여러분의 세대는 그것을 더욱 변화시킬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수 형제 자매들을 위한 목소리를 높이세요. 그래서 제가 노인이 되었을 때 이렇게 말할 수 있게요, "저기 케이트가 있습니다. 그녀는 LA 시의회에서 첫번째 한국계 미국인 여성입니다. KW가 맞습니다— 우리는 그 당시에는 그런 목소리를 내지 못했지만, 지금은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나누고 있는 이야기들은 당신과 저스틴 천이 등장하는 LA 타임즈 기사와 비슷합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한국계 미국인의 시각에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의 영화 “국”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한인 교민사회 이야기를 전하는 창의적인 방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아름다우면서도 비극적이였습니다.
영화 “국"은 저의 가족을 떠오르게도 했기에 많이 좋아했는데요. 저의 조부모님도 콤튼에 가게를 운영하고 계셨고, 당시 아프리칸 아메리칸 커뮤니티 및 갱 멤버들이 도움을 주기도 했다지요. 영화 “국"이 아프리칸 아메리칸 커뮤니티와 미주 한인 커뮤니티의 모습을 긍정적이고 건강하게 묘사하는 것이 좋았습니다.
네, 잘 알려진 이야기죠. 저희 어머니도 일부를 경험했습니다. 우리는 약탈을 당했고 우리 차는 부셔졌지만, 주유소는 결코 불타 없어지지 않았어요. 길 건너편에 있는 것은 불탔지만요. 좋은 관계와 우정은 큰 차이를 만듭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이 틈을 메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의사소통이야말로 정말 중요한 것이에요.
특히 한국 대중문화의 영향이 확산되면서 미주한인 사회의 존재감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우리 도시 내에 우리의 시민적, 사회적 입지를 구축하면서 미주한인 사회에서 보고 싶은 한 가지 변화는 무엇입니까? 젊은 세대가 이 과정을 돕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저는 기성세대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소중히 간직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조금 더 초점이 맞추어지길 바랍니다. 이미 하고는 있지만 조금 더 적극적으로 해보고 싶습니다. 우리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행운입니다. 자유롭게 LGBTQ임을 밝힐 수 있지요. 우리는 인간입니다. 여러분의 정체성을 받아들이세요 —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우리는 문화적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우리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습니다. 정체성이 없이는 우리는 불안정합니다. 정체성이 뚜렷할 때 인종차별적 발언에 당당하게 대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고 우리 미주 한인의 역사도 당신에게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우리를 소수민족의 모델이라 부르는 것을 멈출 필요가 있습니다. 소수민족의 모델이라니... 그것은 어처구니 없는 말이에요. 그래요, 우리는 열심히 일하고 우리를 주장하는 방식도 다릅니다. 하지만 더이상 우리 지역사회를 분류하고 서로가 서로를 겨루도록 하는 것을 멈출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모범적인 소수자가 아닙니다. 나는 모든 종류의 사람입니다. 나는 작가입니다. 변호사이기도 합니다. 래퍼이기도 하죠. 나는 모든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지켜보세요.
테라피(심리치료)였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이런 이야기들을 해왔습니다. 그 이야기들은 제 피부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주유소에서 끔찍한 것들을 봤습니다. 어떤 남자가 오토바이에 치이고, 어떤 여자가 칼에 찔리고, 어떤 남자가 다른 사람에게 총을 쏘는 것도 보았어요. 저는 창의적인 글쓰기를 위해 대학원에 가려고 했습니다. 잘 알려진 작가였던 댄 스텔먼이 저에게 그런 것들에 대해 써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생각해보겠다고 대답했지만, 사실 그냥 저는 제 일을 하면서 학위를 따려고 하고 있었어요. 그때 UC 리버사이드에 한인 센터가 설립될 예정이라는 보도자료를 봤습니다. 저는 "허, 이거 흥미로운데. 센터로 연락해봐야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우연히 에드워드 장 교수가 연락을 받았습니다. 저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혹시 대학원생으로 들어가 함께 일할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는 "그래, 그래, 어서와"라고 말했어요. 그는 제가 폭동에 대해 글을 쓰도록 격려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폭동은 우리 사회에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글쓰기가 정말 힘들었어요. 사람들이 죽었고, 저도 죽을뻔 했죠. 누가 내 머리에 총을 겨눈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결국에는 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습니까? 폭동이 일어난 지 20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아직도 한국계 미국인의 역사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경험 중 하나가 무엇이었는지를 명확히 다루는 서적이 없어요. 당시 사람들은 그들의 부모와 형제자매들을 잃고 죽었습니다. 그래서 이 일을 이루어야만 했습니다. 수개월의 치료 후에, 이 책이 탄생했습니다. 심리치료와 정신 건강은 중요합니다. 그것이 이 책을 만들었습니다.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것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상상해 보세요.
1992년 폭동을 한국계 미국인의 관점 또는 한국계 미국인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여러 측면의 답을 드릴 수 있겠는데요. 개인적으로, 제가 꼽는 가장 큰 이유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잘못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랬어요 "당신들은 거기 없었잖아요. 못 봤잖아요! 그 긴장감이 어땠는지 모르시잖아요. 저쪽 길에 깨진 유리와 갈색 잔디가 있는 학교가 몇 년 동안 그랬다는 것을 여러분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지역사회에는 투자가 없었어요. 당신들은 이해하지 못할거에요!!”. 저는 약간 화가 났지만,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치료와 같았고 카타르시스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한국계 미국인의 관점이 말하여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제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폭동 중에 한국계 미국인들이 소외되고 버려졌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나는 단지 옥상에서 총을 들고 있는 그들을 보았을 뿐입니다."
제 책은 그분들을 악당이 아니라 자신의 가게를 지키는 정직한 사람들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장 교수님이 격려해 주셨고, 이 K.W.님을 비롯하여 여러 분들의 격려를 받았습니다. 그는 보석 같은 분입니다.
NCLC 시작할 때 본 동영상 클립에서 우리는 그가 많은 한국계 미국인들은 그때 없었고 실제로 갱단 멤버들이 우리 공동체를 보호했던 사람들 중 하나였다고 열정적으로 증언하는 동영상을 봤습니다. 동의하나요?
저는 한국인 친구가 없었어요. 저는 그 점에서 좀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저희 세대가 부모님 세대를 경험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KW의 말은 일리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제 학자가 되었기도 하고 사람들이 저에게 진지하게 말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학위를 따기 전에는 사람들이 제 말을 듣지 않았어요. 저는 그냥 화가 난 한국 소녀였을 뿐이었죠. 이제 여러분의 세대는 그것을 더욱 변화시킬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수 형제 자매들을 위한 목소리를 높이세요. 그래서 제가 노인이 되었을 때 이렇게 말할 수 있게요, "저기 케이트가 있습니다. 그녀는 LA 시의회에서 첫번째 한국계 미국인 여성입니다. KW가 맞습니다— 우리는 그 당시에는 그런 목소리를 내지 못했지만, 지금은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나누고 있는 이야기들은 당신과 저스틴 천이 등장하는 LA 타임즈 기사와 비슷합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한국계 미국인의 시각에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의 영화 “국”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한인 교민사회 이야기를 전하는 창의적인 방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아름다우면서도 비극적이였습니다.
영화 “국"은 저의 가족을 떠오르게도 했기에 많이 좋아했는데요. 저의 조부모님도 콤튼에 가게를 운영하고 계셨고, 당시 아프리칸 아메리칸 커뮤니티 및 갱 멤버들이 도움을 주기도 했다지요. 영화 “국"이 아프리칸 아메리칸 커뮤니티와 미주 한인 커뮤니티의 모습을 긍정적이고 건강하게 묘사하는 것이 좋았습니다.
네, 잘 알려진 이야기죠. 저희 어머니도 일부를 경험했습니다. 우리는 약탈을 당했고 우리 차는 부셔졌지만, 주유소는 결코 불타 없어지지 않았어요. 길 건너편에 있는 것은 불탔지만요. 좋은 관계와 우정은 큰 차이를 만듭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이 틈을 메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의사소통이야말로 정말 중요한 것이에요.
특히 한국 대중문화의 영향이 확산되면서 미주한인 사회의 존재감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우리 도시 내에 우리의 시민적, 사회적 입지를 구축하면서 미주한인 사회에서 보고 싶은 한 가지 변화는 무엇입니까? 젊은 세대가 이 과정을 돕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저는 기성세대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소중히 간직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조금 더 초점이 맞추어지길 바랍니다. 이미 하고는 있지만 조금 더 적극적으로 해보고 싶습니다. 우리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행운입니다. 자유롭게 LGBTQ임을 밝힐 수 있지요. 우리는 인간입니다. 여러분의 정체성을 받아들이세요 —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우리는 문화적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우리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습니다. 정체성이 없이는 우리는 불안정합니다. 정체성이 뚜렷할 때 인종차별적 발언에 당당하게 대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고 우리 미주 한인의 역사도 당신에게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우리를 소수민족의 모델이라 부르는 것을 멈출 필요가 있습니다. 소수민족의 모델이라니... 그것은 어처구니 없는 말이에요. 그래요, 우리는 열심히 일하고 우리를 주장하는 방식도 다릅니다. 하지만 더이상 우리 지역사회를 분류하고 서로가 서로를 겨루도록 하는 것을 멈출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모범적인 소수자가 아닙니다. 나는 모든 종류의 사람입니다. 나는 작가입니다. 변호사이기도 합니다. 래퍼이기도 하죠. 나는 모든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지켜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