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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맥
LAPD 전 차장
에밀 맥 님은 은퇴한 로스앤젤레스 소방국의 한미 연합회 부회장입니다. 그는 조직의 관행, 불평등, 적대적인 업무 환경 및 수백만 달러의 소송 노출 문제 개선을 목표로 활동하는 등 LAFD 문화의 많은 변화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2009년 안토니오 빌라라이고자 시장은 에밀 맥 님에게 앤잴리노의 정신과 결의를 가장 잘 보여주는 명망있는 커뮤니티 지도자를 표창하는 “로스 앤젤레스 스피릿” 상을 수여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어릴 때 미국에 입양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 입양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저는 한국 전쟁이 끝난 직후, 한국에서 매우 어려운 시기에 태어났어요. 제가 듣기로는, 당시 생존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시절이어서 저의 어머니가 선택을 했어야만 하셨대요. 그렇게 제 어머니는 저를 경찰서에 맡기면서 저를 도저히 돌볼 수가 없다고 하셨고, 그 경찰관들이 저를 고아원으로 보냈어요. 그 즈음 미국에서는 저의 양부모님이 되실 분들께서 교회의 입양 기관이 주최한 행사에 참석하셨어요. 그 행사에는 입양을 기다리는 수백 명의 한국 아이들 사진들이 담긴 큰 책자가 있었어요. 지금의 양어머니께서 저한테 말씀하시는게, 그 때 수백 장의 사진을 뒤적이다가 우리 아버지가 제 사진을 보고 “얘가 딱이다” 라고 하셨데요. 제 어머니가 알았다고 하시며 그 책의 페이지를 뒤로 넘기려고 하시는데도 우리 아버지가 꿋꿋하게 제 사진을 콕 찍고 놓지 않으셨다고 하셨어요. 결국 저희 부모님은 저를 입양하겠다는 소식을 한국에 보냈는데 한국 입양 기관에서 그 아이는 많이 아프니까 다른 아이를 택하라고 답이 왔다고 해요. 하지만 제 아버지는 이 소식을 듣고 어머니에게 “ 그 아이가 아니면 우리는 입양하지 않겠다고 편지하라"고 하셨대요. 그러다보니 저는 이미 미국행 비행기에 앉아 있었어요.
저는 Crenshaw와 Jefferson 거리에 있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가정에서 자랐어요. 보통 다른 입양자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신들이 (그 가정에) 받아들여짐을 느꼈다고 말해요. 좋은 이야기는 맞죠. 하지만 저의 경우 제 가족들이 저를 어떻게 대해주셨는지를 생각해볼 때, 저에게 그런 ‘받아들임’은 전혀 없었어요. 왜냐하면 제 입양 가족은 저를 달리 취급하지도 않으셨고 내가 그분들의 친아들인 것처럼 대해 주셨거든요. 저에게 있어 입양은 제가 이 가족의 일부라고 느끼게 하는 정말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자라면서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어떻게 키웠나요? 정체성에 관하여 중요하게 생각하셨나요?
평생을 흑인 가정에서 살아서인지 그게 저의 정체성이 되었어요. 다른 사람들이랑 지내는 것도 쉬웠어요. 겉모습은 한국인 같지만 저는 흑인 가정에서 자랐기에 다른 흑인들은 저를 보고 “우리같이 생기진 않았지만 행동은 우리랑 똑같네.” 라고 해요. 그리고 아시안들은 저를 보고 “우리랑 똑같이 생겼는데 행동이 되게 다르네” 라고 하죠. 제 삶을 돌아보면 저의 양육 환경이 저의 정체성과 성격, 그리고 저의 자아를 형성했다고 봅니다. 저는 이렇게 삶을 살아왔어요. 저의 겉모습 덕분에 저는 모든 그룹의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었습니다. 이건 자라면서 도움이 정말 많이 됐어요, 왜냐하면 당시 주변에 많은 갱(gang)들이 있었기 때문이죠. 저와 흑인 사회와의 연결고리 덕분에 흑인 갱 리더가 저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어느 날 제 아내와 함께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방송하던 “거리의 갱들”이라는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데, 제가 아내에게 항상 저를 보호해주던 그 친구 이야기를 해주곤 했어요. 그런데 그 방송에서 갑자기 그 친구가 나오는 거예요. 그는 자기가 어떻게 당시 크립스의 라이벌 조직을 시작하였는지 그 역사를 설명하고 있었어요. 그 친구를 TV에서 보니 정말 재미있었어요.
저는 제 자신에게 “나는 누굴까” 라는 질문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나는 나니까. 다른 여러 분들과 대화하고 소통할 때도 내 자신이 누구인지를 의심을 한 적이 없었고 그 필요를 느끼지 않았어요. 하지만 제가 처음으로 한인 사회를 접하게 된 것은 LA 폭동 때였는데, 그 폭동 첫날 밤이었던 수요일에 현장에 소방차를 타고 출동했을 때였습니다. 우리가 한인타운에 출동한 첫 소방차였어요. 당시 어떤 차 두 대가 Payless Shoestore 앞에 주차를 했는데, 여덟 명이 차에서 나와 보도에 줄을 지어 섰습니다. 도대체 뭘 하는 것일까 생각하며 그들을 쳐다보고 있는데, 그 사람들이 그 가게로 총을 쏘기 시작했어요. 몇 초 후에 가게 안에 있던 한인 주인이 나와서 총을 쏘며 반격했습니다. 진짜 무슨 웨스턴 영화에나 나오는 장면 같았죠. 옆 블록을 비롯하여 산타모니카 고속도로가 있는 곳 까지 같은 일을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거대한 연기가 거치 전체를 덮었던 장면을 기억합니다.
그럼 LA 폭동 때 그 두 그룹의 갈등이 느껴지셨나요?
그 폭동은 저에게 있어서 “이 두 공동체 사이에 문제가 있군” 이라는 첫 알림이었어요. 흑인 가족과 살아온 한인으로서 마음이 찢어졌습니다. 폭동이 일어나고 몇 년 후에 한인 성직자와 흑인 성직자들이 화해와 치유를 위해 모여서 대화하는 자리에 가게 되었어요. 그 자리에서 그들은 저에게 “어떻게 느끼십니까? 이 사건이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라고 물어보시더군요. 마음이 아픕니다. 제가 태어났을 때부터 소속된 두 공동체가 충돌하는 것을 보니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제가 가진 두 정체성이 어울리지 못하는 어색한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서 하는 일처럼 두 공동체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것이 저에게 희망을 준다고 대답했습니다.
소방관으로 일하신다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감히 상상이 되지않는데요. 어떤 것이 선생님께 “이 길을 걸어야겠다”라는 깨달음을 주었나요?
저는 자라면서 소방관이 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던건 제 또래 친구였죠. 고등학교 때, 제가 어울리던 친구들은 UCLA에 들어가 장래에 변호사, 의사나 비즈니스맨이 되려고 하는 친구들이었어요. 그래서 저도 자연스럽게 UCLA를 갔는데, 사람들이 저보고 “너는 뭐가 되고 싶니?” 라고 묻더라고요. 그때 저는 ‘잘 모르겠지만, 친구들이 하고 싶어하는 것을 해볼까?’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다보니 저는 의사가 되는 길을 가고 있었죠. 그런데 갑자기 어느날 친구가 전화해서는 “야! 우리 소방관 하자!” 라고 했어요. 그때 저는 “뭐지? 나는 지금 대학을 다니고 있고, 다른 친구들처럼 의사가 되려고 하는데…” 하고 망설였어요. 그 친구는 망설이는 저에게 “그래 네가 소방관이 되기 싫다면 안해도 괜찮은데, 내 시험 준비 같은 것만 좀 도와달라"고 했고 저는 알았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 친구와 같이 소방관 시험용 책을 가지러 가고 있는데 그가 저에게 “네가 나랑 이 시험을 같이 봐주면 내가 시험을 기분 좋게 잘 볼 것 같아.” 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또 망설이면서 “아니, 시험 접수라든가 뭘 해야 시험을 볼 수 있는거 아니야?”라고 묻자 그 친구는 “걱정하지 마, 이미 네 신청서 제출했어” 라고 했어요. 결국 우리는 같이 시험을 봤고 둘 다 합격 했어요. 그러고나서 친구는 “나 이제 인터뷰를 위해 공부해야 되는데, 네가 나보다 말을 잘하니까 나랑 같이 소방서에 좀 가줘. 우리 소방관들이랑 이야기해보고 그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알아보자!”라고 했어요. 그렇게 저는 친구에게 소방서로 끌려가게 됐어요. 거기에 계시던 소방관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한 달에 11일만 일하면서 돈도 꽤 많이 벌고,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고 재미도 있다는 소리에 귀가 솔깃해졌어요. 결국 우리 둘 다 인터뷰를 통과하고 채용 제안을 받았습니다. 이 시점에 저는 확실히 혼란에 빠졌죠. 하지만 생각을 해볼수록 이 직업은 성취감이 높은 직업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만약 사람들이 우리를 부르면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이가 우리 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들의 문제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그들에게 도움을 주고 문제를 해결해 줄 뿐 아니라,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한다는 점에서 이 직업에 반했어요. 그렇게 소방관 채용 제안을 받았을 때, 저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부모님과 의사 친구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그들은 모두 “뭐? 무슨 일을 하겠다고?” 하면서 놀랐고, 제 어머니도 “뭘 한다고? 그게 얼마나 위험한지는 알고 있니? 죽을 수도 있어!”라고 말씀 하셨어요. 하지만 저의 아버지께서는 (엄지를 올리시며) 멋있다며 격려를 해주셨어요. 엄마는 안 그러셨지만요.
이 일을 하시면서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일이 있었나요?
저는 이 직업이 정말 좋아요. 많은 것을 볼 수 있고 좋은 일도 많이 하니까요. 소방관이 돼서 저는 오바마, 부시, 와 바이덴을 여러 행사에서 만나볼 수 있었어요. 아놀드 슈왈제네거와 같이 있었던 적도 있었죠. 재미있는 분이에요. 우리 팀이 훈련을 하고 있는데 그 분이 우리를 참관하기 위해 오신다고 소식이 들어왔어요. 조금 후 갑자기 검은 헬리콥터 한 대가 가까이 오더군요. 자갈과 흙이 여기저기 튀니까 카메라를 들고 있던 사람들이 멀리 뛰어가고 있었어요. 헬리콥터가 착륙을 하고 한 십 분 동안 가만히 있길래 언제 나오시나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영화 처럼 아놀드씨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신 거예요. 완벽한 메이크업을 하시고요. 그는 덩치가 큰 두 보디가드들과 함께 저벅 저벅 걸어 나오셨습니다. 그를 맞이하기 위해 제가 다가서자 보디가드들이 “당신 뭐야"라는 듯이 저를 막길래, 그분이 훈련에 참관하는 것을 에스코트 하러 왔다고 하면서 그 둘 사이에 1인치 간격으로 비집고 들어가 아놀드씨와 악수를 했습니다. 정말 영화에 나오는 장면 같았어요. 대통령들을 만났을 때도 보니까 기념 사진을 위해 메이크업도 하시고 항상 공들여 준비하시는 것 같았어요.
제 직업은 매일 다른 일을 하고, 모든 것이 새롭고, 저에게 도전하는 마음을 주어서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언제 출동할지 모르는 상황이 많았지만, 그 경험을 통해서 좋은 마음가짐을 갖게 되었습니다. 소방관으로서 배운 것 중에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소방관은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우리는 기본적으로 그럴 수 없어요. 이 직업은 정말로 보람도 있고 흥미도 있고, 시장과 시의회와 같이 일할 수 있는 기회도 생기고 그리고 해외을 돌아다니기도 하죠. 제가 다른 길을 갔다면 그런 일들을 못해봤을 거에요.
한인 소방관들은 많나요?
그렇지는 않아요. 제가 훈련 부서를 맡았을 때 훈련을 받던 두 분의 아시안과 대화를 해볼 수 있었는데, 한 분은 이제 막 어려운 훈련 과정을 마쳤지만 곧 이 일을 관두어야 한다고 했어요. 이유를 물어 봤고 그의 답은 가족 때문이었어요. 다른 한 분은 훈련 과정을 완전히 마치고 사실상 재직 중인 상태였는데 같은 이유로 사직을 했습니다. “가족이 이 일을 원하지 않고 나는 의사가 되어야 한다"와 같은 이유로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두 분의 사직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이 두 분은 소방관이 될 자격이 충분했고 만약 소방관이 되었다면 특급 소방관이 될 수 있었을 거라 믿어요. 최근 좋은 소식은, 많은 아시안들이 이 직업에 관심을 갖고 찾아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체 소방관들 수에 비하면 적은 숫자이긴 하지만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사람들마다 “성공”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죠. 가족의 뜻에 따라 의사가 되기 위해 소방관을 그만 둔 분들 처럼요. 그렇다면 선생님이 정의하는 “성공”은 무엇이고, 그것에 도달하셨다고 생각하시나요?
제가 생각하는 “성공”은 변화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에도 이런 생각을 했냐고요? 전혀요.
하지만 이제 어른이 되어 제 삶을 돌아보면서 자신에게 물어볼 때가 많았어요. “어떤 일이 나로 하여금 내가 삶을 살았다고 여기게 만드는가?” 그래요. 어쩌면 삶은 그냥 방에 처박혀서 매일 TV나 보고 살 수도 있죠. 하지만 그게 당신에게 성취감을 주나요? 저는 무엇이 나에게 성취감을 주는지를 봅니다. 내 삶의 목적을 만들어 주는 일을 하고 다른 사람들의 삶을 도와주는 일이 저에게는 성취감을 주는 것 같아요. 제가 한인 청년들이랑 같이 만날 때는 그들에게 매번 대담하게 살라고 이야기 해요. 안주하지 말고 편안함을 넘으라고. 특히 대학교에 있는 친구들도 마찬가지에요. 평범한 삶에서는 결코 만나지 못할 사람들과 여러 인종과 다양한 문화에 속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잖아요. 그 시간과 기회를 놓치지 말고 그 사람들을 만나 보세요. 당신이 편안하게 느끼는 한국 친구들 사이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시야를 넓혀 보세요. 물론 한국인의 그룹도 좋죠, 그들은 당신의 든든한 지원자이자 좋은 친구니까요. 그렇지만 조금더 당신의 영역을 넓혀 보세요. 사람들을 많이 만나세요. 그곳에서 당신의 연결고리들을 만들어 보세요. 왜냐하면 저도 같은 경험이 있었거든요. 생각해보세요. 당신이 어떤 일을 하다가 갑자기 AT&T와 연락할 일이 생겼어요. 그러면 당신은 “아! 내 대학 친구가 지금 AT&T에서 시니어 매니저로 일하고 있지! 전화 한 번 해 보자”라고 하게 될 거예요. 그 백인 친구를 몰랐다면 쉽게 관리자에게 전화를 할 수 있었을까요? 그를 몰랐다면 당신은 대기자 명단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그와 통화할 수 없었을거에요. 지금부터 당신의 시야를 넓혀야 합니다. 다가가세요. 당신의 영역을 넓히세요. 자신의 가치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관계들과 함께 올라가요. 그러니 대담해지세요. 용감해지세요. 다가가세요. 편안함을 주는 공간에서 뛰쳐 나오세요. 불편하다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좋은 현상이라 생각해요. 왜냐하면 그것은 당신이 당신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의미이니까요. 맨날 TV앞에서 앉아 있는건 너무 편할 수 밖에 없죠. 그러지 말아요.
저는 한국 전쟁이 끝난 직후, 한국에서 매우 어려운 시기에 태어났어요. 제가 듣기로는, 당시 생존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시절이어서 저의 어머니가 선택을 했어야만 하셨대요. 그렇게 제 어머니는 저를 경찰서에 맡기면서 저를 도저히 돌볼 수가 없다고 하셨고, 그 경찰관들이 저를 고아원으로 보냈어요. 그 즈음 미국에서는 저의 양부모님이 되실 분들께서 교회의 입양 기관이 주최한 행사에 참석하셨어요. 그 행사에는 입양을 기다리는 수백 명의 한국 아이들 사진들이 담긴 큰 책자가 있었어요. 지금의 양어머니께서 저한테 말씀하시는게, 그 때 수백 장의 사진을 뒤적이다가 우리 아버지가 제 사진을 보고 “얘가 딱이다” 라고 하셨데요. 제 어머니가 알았다고 하시며 그 책의 페이지를 뒤로 넘기려고 하시는데도 우리 아버지가 꿋꿋하게 제 사진을 콕 찍고 놓지 않으셨다고 하셨어요. 결국 저희 부모님은 저를 입양하겠다는 소식을 한국에 보냈는데 한국 입양 기관에서 그 아이는 많이 아프니까 다른 아이를 택하라고 답이 왔다고 해요. 하지만 제 아버지는 이 소식을 듣고 어머니에게 “ 그 아이가 아니면 우리는 입양하지 않겠다고 편지하라"고 하셨대요. 그러다보니 저는 이미 미국행 비행기에 앉아 있었어요.
저는 Crenshaw와 Jefferson 거리에 있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가정에서 자랐어요. 보통 다른 입양자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신들이 (그 가정에) 받아들여짐을 느꼈다고 말해요. 좋은 이야기는 맞죠. 하지만 저의 경우 제 가족들이 저를 어떻게 대해주셨는지를 생각해볼 때, 저에게 그런 ‘받아들임’은 전혀 없었어요. 왜냐하면 제 입양 가족은 저를 달리 취급하지도 않으셨고 내가 그분들의 친아들인 것처럼 대해 주셨거든요. 저에게 있어 입양은 제가 이 가족의 일부라고 느끼게 하는 정말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자라면서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어떻게 키웠나요? 정체성에 관하여 중요하게 생각하셨나요?
평생을 흑인 가정에서 살아서인지 그게 저의 정체성이 되었어요. 다른 사람들이랑 지내는 것도 쉬웠어요. 겉모습은 한국인 같지만 저는 흑인 가정에서 자랐기에 다른 흑인들은 저를 보고 “우리같이 생기진 않았지만 행동은 우리랑 똑같네.” 라고 해요. 그리고 아시안들은 저를 보고 “우리랑 똑같이 생겼는데 행동이 되게 다르네” 라고 하죠. 제 삶을 돌아보면 저의 양육 환경이 저의 정체성과 성격, 그리고 저의 자아를 형성했다고 봅니다. 저는 이렇게 삶을 살아왔어요. 저의 겉모습 덕분에 저는 모든 그룹의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었습니다. 이건 자라면서 도움이 정말 많이 됐어요, 왜냐하면 당시 주변에 많은 갱(gang)들이 있었기 때문이죠. 저와 흑인 사회와의 연결고리 덕분에 흑인 갱 리더가 저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어느 날 제 아내와 함께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방송하던 “거리의 갱들”이라는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데, 제가 아내에게 항상 저를 보호해주던 그 친구 이야기를 해주곤 했어요. 그런데 그 방송에서 갑자기 그 친구가 나오는 거예요. 그는 자기가 어떻게 당시 크립스의 라이벌 조직을 시작하였는지 그 역사를 설명하고 있었어요. 그 친구를 TV에서 보니 정말 재미있었어요.
저는 제 자신에게 “나는 누굴까” 라는 질문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나는 나니까. 다른 여러 분들과 대화하고 소통할 때도 내 자신이 누구인지를 의심을 한 적이 없었고 그 필요를 느끼지 않았어요. 하지만 제가 처음으로 한인 사회를 접하게 된 것은 LA 폭동 때였는데, 그 폭동 첫날 밤이었던 수요일에 현장에 소방차를 타고 출동했을 때였습니다. 우리가 한인타운에 출동한 첫 소방차였어요. 당시 어떤 차 두 대가 Payless Shoestore 앞에 주차를 했는데, 여덟 명이 차에서 나와 보도에 줄을 지어 섰습니다. 도대체 뭘 하는 것일까 생각하며 그들을 쳐다보고 있는데, 그 사람들이 그 가게로 총을 쏘기 시작했어요. 몇 초 후에 가게 안에 있던 한인 주인이 나와서 총을 쏘며 반격했습니다. 진짜 무슨 웨스턴 영화에나 나오는 장면 같았죠. 옆 블록을 비롯하여 산타모니카 고속도로가 있는 곳 까지 같은 일을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거대한 연기가 거치 전체를 덮었던 장면을 기억합니다.
그럼 LA 폭동 때 그 두 그룹의 갈등이 느껴지셨나요?
그 폭동은 저에게 있어서 “이 두 공동체 사이에 문제가 있군” 이라는 첫 알림이었어요. 흑인 가족과 살아온 한인으로서 마음이 찢어졌습니다. 폭동이 일어나고 몇 년 후에 한인 성직자와 흑인 성직자들이 화해와 치유를 위해 모여서 대화하는 자리에 가게 되었어요. 그 자리에서 그들은 저에게 “어떻게 느끼십니까? 이 사건이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라고 물어보시더군요. 마음이 아픕니다. 제가 태어났을 때부터 소속된 두 공동체가 충돌하는 것을 보니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제가 가진 두 정체성이 어울리지 못하는 어색한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서 하는 일처럼 두 공동체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것이 저에게 희망을 준다고 대답했습니다.
소방관으로 일하신다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감히 상상이 되지않는데요. 어떤 것이 선생님께 “이 길을 걸어야겠다”라는 깨달음을 주었나요?
저는 자라면서 소방관이 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던건 제 또래 친구였죠. 고등학교 때, 제가 어울리던 친구들은 UCLA에 들어가 장래에 변호사, 의사나 비즈니스맨이 되려고 하는 친구들이었어요. 그래서 저도 자연스럽게 UCLA를 갔는데, 사람들이 저보고 “너는 뭐가 되고 싶니?” 라고 묻더라고요. 그때 저는 ‘잘 모르겠지만, 친구들이 하고 싶어하는 것을 해볼까?’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다보니 저는 의사가 되는 길을 가고 있었죠. 그런데 갑자기 어느날 친구가 전화해서는 “야! 우리 소방관 하자!” 라고 했어요. 그때 저는 “뭐지? 나는 지금 대학을 다니고 있고, 다른 친구들처럼 의사가 되려고 하는데…” 하고 망설였어요. 그 친구는 망설이는 저에게 “그래 네가 소방관이 되기 싫다면 안해도 괜찮은데, 내 시험 준비 같은 것만 좀 도와달라"고 했고 저는 알았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 친구와 같이 소방관 시험용 책을 가지러 가고 있는데 그가 저에게 “네가 나랑 이 시험을 같이 봐주면 내가 시험을 기분 좋게 잘 볼 것 같아.” 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또 망설이면서 “아니, 시험 접수라든가 뭘 해야 시험을 볼 수 있는거 아니야?”라고 묻자 그 친구는 “걱정하지 마, 이미 네 신청서 제출했어” 라고 했어요. 결국 우리는 같이 시험을 봤고 둘 다 합격 했어요. 그러고나서 친구는 “나 이제 인터뷰를 위해 공부해야 되는데, 네가 나보다 말을 잘하니까 나랑 같이 소방서에 좀 가줘. 우리 소방관들이랑 이야기해보고 그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알아보자!”라고 했어요. 그렇게 저는 친구에게 소방서로 끌려가게 됐어요. 거기에 계시던 소방관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한 달에 11일만 일하면서 돈도 꽤 많이 벌고,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고 재미도 있다는 소리에 귀가 솔깃해졌어요. 결국 우리 둘 다 인터뷰를 통과하고 채용 제안을 받았습니다. 이 시점에 저는 확실히 혼란에 빠졌죠. 하지만 생각을 해볼수록 이 직업은 성취감이 높은 직업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만약 사람들이 우리를 부르면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이가 우리 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들의 문제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그들에게 도움을 주고 문제를 해결해 줄 뿐 아니라,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한다는 점에서 이 직업에 반했어요. 그렇게 소방관 채용 제안을 받았을 때, 저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부모님과 의사 친구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그들은 모두 “뭐? 무슨 일을 하겠다고?” 하면서 놀랐고, 제 어머니도 “뭘 한다고? 그게 얼마나 위험한지는 알고 있니? 죽을 수도 있어!”라고 말씀 하셨어요. 하지만 저의 아버지께서는 (엄지를 올리시며) 멋있다며 격려를 해주셨어요. 엄마는 안 그러셨지만요.
이 일을 하시면서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일이 있었나요?
저는 이 직업이 정말 좋아요. 많은 것을 볼 수 있고 좋은 일도 많이 하니까요. 소방관이 돼서 저는 오바마, 부시, 와 바이덴을 여러 행사에서 만나볼 수 있었어요. 아놀드 슈왈제네거와 같이 있었던 적도 있었죠. 재미있는 분이에요. 우리 팀이 훈련을 하고 있는데 그 분이 우리를 참관하기 위해 오신다고 소식이 들어왔어요. 조금 후 갑자기 검은 헬리콥터 한 대가 가까이 오더군요. 자갈과 흙이 여기저기 튀니까 카메라를 들고 있던 사람들이 멀리 뛰어가고 있었어요. 헬리콥터가 착륙을 하고 한 십 분 동안 가만히 있길래 언제 나오시나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영화 처럼 아놀드씨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신 거예요. 완벽한 메이크업을 하시고요. 그는 덩치가 큰 두 보디가드들과 함께 저벅 저벅 걸어 나오셨습니다. 그를 맞이하기 위해 제가 다가서자 보디가드들이 “당신 뭐야"라는 듯이 저를 막길래, 그분이 훈련에 참관하는 것을 에스코트 하러 왔다고 하면서 그 둘 사이에 1인치 간격으로 비집고 들어가 아놀드씨와 악수를 했습니다. 정말 영화에 나오는 장면 같았어요. 대통령들을 만났을 때도 보니까 기념 사진을 위해 메이크업도 하시고 항상 공들여 준비하시는 것 같았어요.
제 직업은 매일 다른 일을 하고, 모든 것이 새롭고, 저에게 도전하는 마음을 주어서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언제 출동할지 모르는 상황이 많았지만, 그 경험을 통해서 좋은 마음가짐을 갖게 되었습니다. 소방관으로서 배운 것 중에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소방관은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우리는 기본적으로 그럴 수 없어요. 이 직업은 정말로 보람도 있고 흥미도 있고, 시장과 시의회와 같이 일할 수 있는 기회도 생기고 그리고 해외을 돌아다니기도 하죠. 제가 다른 길을 갔다면 그런 일들을 못해봤을 거에요.
한인 소방관들은 많나요?
그렇지는 않아요. 제가 훈련 부서를 맡았을 때 훈련을 받던 두 분의 아시안과 대화를 해볼 수 있었는데, 한 분은 이제 막 어려운 훈련 과정을 마쳤지만 곧 이 일을 관두어야 한다고 했어요. 이유를 물어 봤고 그의 답은 가족 때문이었어요. 다른 한 분은 훈련 과정을 완전히 마치고 사실상 재직 중인 상태였는데 같은 이유로 사직을 했습니다. “가족이 이 일을 원하지 않고 나는 의사가 되어야 한다"와 같은 이유로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두 분의 사직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이 두 분은 소방관이 될 자격이 충분했고 만약 소방관이 되었다면 특급 소방관이 될 수 있었을 거라 믿어요. 최근 좋은 소식은, 많은 아시안들이 이 직업에 관심을 갖고 찾아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체 소방관들 수에 비하면 적은 숫자이긴 하지만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사람들마다 “성공”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죠. 가족의 뜻에 따라 의사가 되기 위해 소방관을 그만 둔 분들 처럼요. 그렇다면 선생님이 정의하는 “성공”은 무엇이고, 그것에 도달하셨다고 생각하시나요?
제가 생각하는 “성공”은 변화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에도 이런 생각을 했냐고요? 전혀요.
하지만 이제 어른이 되어 제 삶을 돌아보면서 자신에게 물어볼 때가 많았어요. “어떤 일이 나로 하여금 내가 삶을 살았다고 여기게 만드는가?” 그래요. 어쩌면 삶은 그냥 방에 처박혀서 매일 TV나 보고 살 수도 있죠. 하지만 그게 당신에게 성취감을 주나요? 저는 무엇이 나에게 성취감을 주는지를 봅니다. 내 삶의 목적을 만들어 주는 일을 하고 다른 사람들의 삶을 도와주는 일이 저에게는 성취감을 주는 것 같아요. 제가 한인 청년들이랑 같이 만날 때는 그들에게 매번 대담하게 살라고 이야기 해요. 안주하지 말고 편안함을 넘으라고. 특히 대학교에 있는 친구들도 마찬가지에요. 평범한 삶에서는 결코 만나지 못할 사람들과 여러 인종과 다양한 문화에 속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잖아요. 그 시간과 기회를 놓치지 말고 그 사람들을 만나 보세요. 당신이 편안하게 느끼는 한국 친구들 사이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시야를 넓혀 보세요. 물론 한국인의 그룹도 좋죠, 그들은 당신의 든든한 지원자이자 좋은 친구니까요. 그렇지만 조금더 당신의 영역을 넓혀 보세요. 사람들을 많이 만나세요. 그곳에서 당신의 연결고리들을 만들어 보세요. 왜냐하면 저도 같은 경험이 있었거든요. 생각해보세요. 당신이 어떤 일을 하다가 갑자기 AT&T와 연락할 일이 생겼어요. 그러면 당신은 “아! 내 대학 친구가 지금 AT&T에서 시니어 매니저로 일하고 있지! 전화 한 번 해 보자”라고 하게 될 거예요. 그 백인 친구를 몰랐다면 쉽게 관리자에게 전화를 할 수 있었을까요? 그를 몰랐다면 당신은 대기자 명단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그와 통화할 수 없었을거에요. 지금부터 당신의 시야를 넓혀야 합니다. 다가가세요. 당신의 영역을 넓히세요. 자신의 가치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관계들과 함께 올라가요. 그러니 대담해지세요. 용감해지세요. 다가가세요. 편안함을 주는 공간에서 뛰쳐 나오세요. 불편하다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좋은 현상이라 생각해요. 왜냐하면 그것은 당신이 당신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의미이니까요. 맨날 TV앞에서 앉아 있는건 너무 편할 수 밖에 없죠. 그러지 말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