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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정
선교사, 침술사
해 정님은 선교사이자 전 침술사입니다. 한때 노숙자로서 시련을 겪은 후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친절의 행동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셨습니다. 해 정님은 미얀마에서 아프가니스탄, 라오스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를 여행하였고, 현재는 코리아 타운에 거주하며 LACCC에서 영어 공부와 나눔을 하며 한미 공동체에 활력을 불어 넣고자 합니다.
미국으로 언제 이민 오셨어요?
저는 나이가 든 뒤에 이민 왔습니다. 2002년인가, 2003년이었나..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네요.
학교는 어디 다니셨나요?
제가 미국에 왔을 때, 신학대학을 다녔습니다. 지금은 그 학교가 없어졌지만, 당시 장학금과 학생 비자를 지원 받아서 다니게 되었어요. 학교는 없어졌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죠. 어떻게 보면 불행하게 보일 수 있겠지만, 제가 미국에 올 당시 저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왔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제가 신학대를 졸업하고 나서부터는 한의학 공부를 하기 시작했어요. 어렸을 때 부터 한약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제 할아버지도 그쪽 일을 하셨거든요. 그래서 저도 한약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여기(미국)에서 한의대 졸업을 했습니다. 사실은 힘들게 공부했어요. 그것도 5년 과정이거든요. 솔직히 말하자면 뼈 빠지게 공부만 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영어가 안되니까 일상 생활이 굉장히 힘들더라고요. 한의대 졸업은 해야 되는데 갚아야 할 돈도 있고, 일도 해야 하는데… 그런데 얼마 전에 알게 된 것이 있는데, 저는 돈을 가까이 하면 안 어울린다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돈을 벌려고 하면 사람들을 좀 속여야 돈을 벌어요. 사람이 융통성이 없거나 정직하면 돈을 못 벌어요. 그런데 전 순수하게 살아왔거든요. 그런데 세상은 복잡하잖아요.
그래서 여기서 공부 끝나고 10년 전에 메릴랜드에 갔었지요. 청운의 꿈을 꾸고... 여기엔 전세계 사기꾼이 다 온다는 전설이 있잖아요. 제가 그래서 D.C.에서 돈을 벌어서 멋지게 한번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그곳에서 한의원을 열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게 되나요? 비즈니스가? 한의원은 사실 약을 처방해야 먹고 살거든요. 그래야 렌트비 내고, 직원들 월급 주고...침만 놓고는 비즈니스가 안되는 거에요. 그래서 결국 한의원을 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주차 위반 티켓을 받았어요. 벌금 물러 사무소에 가면 사람을이 쫙 있잖아요. 그 사람들의 표정을 봤는데 다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거에요. 왜일까요? 생각하지 못했던 돈을 내야 되잖아요. 그런데 사무처에서 돈을 받는 사람도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거 있죠? 왜냐하면 매일 얼굴 찡그린 사람들이 와서 찡그린 돈을 받으니까 받는 사람도 얼굴이 찡그려지는 거지요. 그래서 저는 직업을 가지더라도 남을 도와주는 직업을 갖는게 좋다고 생각해요. 그럼 자기 정신 건강에도, 삶에도 좋잖아요. 직업이라는 것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인데, 수입이 적어도 내가 좋아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진다면 아메리칸 드림이 이루어질 것 같은데요? 그저 눈에 보이는 것만 좆아 간다면 아메리칸 드림은 절망이 될 수 있지요.
제가 지금 로스앤젤레스 커뮤니티 칼리지(Los Angeles County Community College)의 non-credit 영어 ESL 과정에 들어간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이민 생활 초기에 너무 힘이 드니까 언어를 포기했거든요. 당장 먹고 살아야 되니까... 그런데 먹고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힘들어도 ESL프로그램에 야간에 들으면서 영어를 할 수 있다면 더 나은 직업을 선택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이민 왔을 때 처음에 그 선택을 잘 했으면 좋겠습니다.
영어 때문에 소통에 문제가 있었다고 하셨잖아요, 그것 때문에 법률적 또는 사회적 서비스를 받는데에 지장이 없으셨나요?
아.. 원망을 많이 했지요. “내가 왜 춘천 산골 굉장히 좋은 곳에서 살다가 왜 여기에 와서 이 고생을 하나” 하고요. 먹고 싶은 것도 못 사먹잖아요. 공부하는 시간은 굉장히 배고픈 시간이에요. 언어의 장애라는 건 쉽게 얘기하면 모든 생활에 장애를 받는 거에요. 그러다보니까 생활의 절망이 오게 되니 자살을 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자살이 성공했으면 제가 이 자리에 있겠습니까? 자살을 하려다 보면 후유증이 생깁니다. 그럼 우울증이 오게 돼요. 조울증이 오고 내 감정이 통제가 안되는 거에요. 맨 처음엔 몰랐습니다. 그런데 한 번, 두 번 당하다 보면 어떻게 되나요? 마음에 엄청난 상처를 받는거죠. 그래서 사실 지금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사실 장애인이 된 것이죠. 이민 생활 중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나와 남의 문화가 다르다는 이유로 왕따를 시키는 겁니다. 그 사람의 사연이 다 있는건데, 그 사람의 말은 듣지도 않고 상대방의 얘기만 듣고 그 사람을 판단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문화는 사람을 너무 쉽게 판단하는 것 같아요. 그 사람은 힘들어 죽겠다고 하는데 거기에 또 돌을 던져요.
저는 나이가 든 뒤에 이민 왔습니다. 2002년인가, 2003년이었나..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네요.
학교는 어디 다니셨나요?
제가 미국에 왔을 때, 신학대학을 다녔습니다. 지금은 그 학교가 없어졌지만, 당시 장학금과 학생 비자를 지원 받아서 다니게 되었어요. 학교는 없어졌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죠. 어떻게 보면 불행하게 보일 수 있겠지만, 제가 미국에 올 당시 저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왔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제가 신학대를 졸업하고 나서부터는 한의학 공부를 하기 시작했어요. 어렸을 때 부터 한약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제 할아버지도 그쪽 일을 하셨거든요. 그래서 저도 한약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여기(미국)에서 한의대 졸업을 했습니다. 사실은 힘들게 공부했어요. 그것도 5년 과정이거든요. 솔직히 말하자면 뼈 빠지게 공부만 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영어가 안되니까 일상 생활이 굉장히 힘들더라고요. 한의대 졸업은 해야 되는데 갚아야 할 돈도 있고, 일도 해야 하는데… 그런데 얼마 전에 알게 된 것이 있는데, 저는 돈을 가까이 하면 안 어울린다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돈을 벌려고 하면 사람들을 좀 속여야 돈을 벌어요. 사람이 융통성이 없거나 정직하면 돈을 못 벌어요. 그런데 전 순수하게 살아왔거든요. 그런데 세상은 복잡하잖아요.
그래서 여기서 공부 끝나고 10년 전에 메릴랜드에 갔었지요. 청운의 꿈을 꾸고... 여기엔 전세계 사기꾼이 다 온다는 전설이 있잖아요. 제가 그래서 D.C.에서 돈을 벌어서 멋지게 한번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그곳에서 한의원을 열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게 되나요? 비즈니스가? 한의원은 사실 약을 처방해야 먹고 살거든요. 그래야 렌트비 내고, 직원들 월급 주고...침만 놓고는 비즈니스가 안되는 거에요. 그래서 결국 한의원을 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주차 위반 티켓을 받았어요. 벌금 물러 사무소에 가면 사람을이 쫙 있잖아요. 그 사람들의 표정을 봤는데 다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거에요. 왜일까요? 생각하지 못했던 돈을 내야 되잖아요. 그런데 사무처에서 돈을 받는 사람도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거 있죠? 왜냐하면 매일 얼굴 찡그린 사람들이 와서 찡그린 돈을 받으니까 받는 사람도 얼굴이 찡그려지는 거지요. 그래서 저는 직업을 가지더라도 남을 도와주는 직업을 갖는게 좋다고 생각해요. 그럼 자기 정신 건강에도, 삶에도 좋잖아요. 직업이라는 것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인데, 수입이 적어도 내가 좋아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진다면 아메리칸 드림이 이루어질 것 같은데요? 그저 눈에 보이는 것만 좆아 간다면 아메리칸 드림은 절망이 될 수 있지요.
제가 지금 로스앤젤레스 커뮤니티 칼리지(Los Angeles County Community College)의 non-credit 영어 ESL 과정에 들어간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이민 생활 초기에 너무 힘이 드니까 언어를 포기했거든요. 당장 먹고 살아야 되니까... 그런데 먹고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힘들어도 ESL프로그램에 야간에 들으면서 영어를 할 수 있다면 더 나은 직업을 선택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이민 왔을 때 처음에 그 선택을 잘 했으면 좋겠습니다.
영어 때문에 소통에 문제가 있었다고 하셨잖아요, 그것 때문에 법률적 또는 사회적 서비스를 받는데에 지장이 없으셨나요?
아.. 원망을 많이 했지요. “내가 왜 춘천 산골 굉장히 좋은 곳에서 살다가 왜 여기에 와서 이 고생을 하나” 하고요. 먹고 싶은 것도 못 사먹잖아요. 공부하는 시간은 굉장히 배고픈 시간이에요. 언어의 장애라는 건 쉽게 얘기하면 모든 생활에 장애를 받는 거에요. 그러다보니까 생활의 절망이 오게 되니 자살을 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자살이 성공했으면 제가 이 자리에 있겠습니까? 자살을 하려다 보면 후유증이 생깁니다. 그럼 우울증이 오게 돼요. 조울증이 오고 내 감정이 통제가 안되는 거에요. 맨 처음엔 몰랐습니다. 그런데 한 번, 두 번 당하다 보면 어떻게 되나요? 마음에 엄청난 상처를 받는거죠. 그래서 사실 지금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사실 장애인이 된 것이죠. 이민 생활 중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나와 남의 문화가 다르다는 이유로 왕따를 시키는 겁니다. 그 사람의 사연이 다 있는건데, 그 사람의 말은 듣지도 않고 상대방의 얘기만 듣고 그 사람을 판단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문화는 사람을 너무 쉽게 판단하는 것 같아요. 그 사람은 힘들어 죽겠다고 하는데 거기에 또 돌을 던져요.
사회에서 힘들게 느끼셨던 부분이 한국 사람들의 강한 자존심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한국 사람들은 필요 이상으로 자존심이 너무 강한 것 같아요. 우리 한국 문화는 돈 없어도 죽어도 좋은 차를 타야 돼요. “내 자식 교육 시키려면 집이 있어야 돼, 뼈가 녹아도...집 안에서는 라면 먹어도 나갈 때는 좋은 옷을 입어야 돼”... 그런데 미국에 오래 살다보면 그런게 없어지는 것 같아요. 남을 의식을 안하죠. 피해도 안주고. 나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이 대인 관계를 최대한 안하는 것이었어요. 그러니 그게 정신적으로는 안 좋았어요. 그것이 나를 지키는 방법이었는데, 그래서 우울증과 조울증 문제가 굉장히 심해졌어요.
우리 한국사에 가장 부족한 대목이 자원봉사가 부족하다는 것이에요. 봉사를 안해요. 그런데 미국에 문화는 봉사를 아주 잘 하잖아요. 우리도 자원봉사를 좀 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이제 봉사 많이 할거에요.
그렇게 이민을 오셔서 힘든 생활을 사셨는데, 한국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은 없나요?
사실, 한국에 이제 아무도 없어요. 저는 이제 미국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국은 한번씩 꿈 속에서나 그려보는 곳이지요… 그 아름다웠던 한국. 우리 한국처럼 아름다운 곳이 없습니다. 작지만 참 하나님이 복 주신 나라에요.
전 배낭을 매고 전 세계를 다 다녀왔습니다. 그게 저의 삶이었어요. 그래서 미국에서도 만 불만 벌면 밖에 나가서 한 7개월 살고 그랬지요. 제가 7년 전에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선교를 갔었어요. 그곳에 가서 제가 몇 개월 못먹고 돌아다니니까 폐렴에 걸렸습니다. 그때 폐렴이 너무 심해서 몸에 전신마비가 왔어요. 휠체어를 타고 기어다니고… 젊었을 땐 괜찮았는데 병이 드니까 모아둔 돈이 없잖아요. 그래서 제가 D.C.에서 노숙자 생활을 2년을 했습니다. 그 후 좀 더 날씨가 나은 곳으로 가는게 좋겠다는 의사의 권고에 로스앤젤레스로 이사를 왔습니다. 이 곳에서 또 노숙자로 몇 달을 살았어요. 노숙자의 삶에서 가장 고달픈게 뭔지 아세요? 아주 기본적인 위생 조차 유지할 수 있는 곳이 아무데도 없다는 거에요.
미국은 구하면 문이 열리는 곳이에요. 이게 가능한 나라죠. 한국은 두드려도 문이 안 열려요. 제가 5-6년 전에 장애인 지원을 받게 됐어요. 연금으로 지금까지 생활을 했지요. 어렵더라도 미국은 좋은 나라입니다. 여기는 조국입니다. 한국도 조국이지만. 그래서 저는 미국도 굉장히 소중하고 한국도 소중합니다. 그런데 우리 코리안 아메리칸들은 도대체가 선거를 안해요. 선거를 해야, 힘이 있어야 여기 예산도 많이 받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생각을 잘 안 하나봐요. 투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르는 것 같습니다. 선거권을 왜 사용을 안하나요? 더 나은 혜택이 있는데…그게 참 안타까워요. 저는 우리 한인들이 정말 전문 분야에, 어느 분야에서도 우뚝 서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민족은 사실 단점보다 장점이 많은 민족이에요. 한국인이 갖고 있는 열정은 타민족에게는 없어요. 우리 한국은 자원도 없잖아요. 오직 인적 자원 하나로 여기까지 왔는데…저는 한국이 갖고 있는 힘은 인적 자원인 것 같아요. 그것이 우리 한국의 큰 자산이고요. 한국에 있는 인물들도 한국의 자산이겠지만, 여기 미국에 있는 코리안 아메리칸 세대도 한국의 아주 큰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정부가 우리 코리안 아메리칸 세대를 위해서 좀 투자를 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하려면 이곳에 선거권 갖고 있는 사람들이 선거 좀 많이 해서 예산을 많이 받아야겠지요. 우리가 서로 공생하는, 서로 살려주는 민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동부에 있는 어떤 대학 교수님이 저의 멘토입니다. 그런데 그 형님이 저에게 한 고백이 있어요. 굉장히 중요한 얘긴데요,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내가 미국 사람인 줄 알았어. 20대에 내가 대학 교수가 되고 동양인으로서 학장도 되고… 그런데 이번에 알았어. 나는 한국인이라는 걸. 완벽하게 미국인처럼 동화될 수 없다는 것을 말이야. 우리가 공부를 열심히 하고 하버드를 졸업한다 해도, 우리는 한국인이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한국 사람들은 필요 이상으로 자존심이 너무 강한 것 같아요. 우리 한국 문화는 돈 없어도 죽어도 좋은 차를 타야 돼요. “내 자식 교육 시키려면 집이 있어야 돼, 뼈가 녹아도...집 안에서는 라면 먹어도 나갈 때는 좋은 옷을 입어야 돼”... 그런데 미국에 오래 살다보면 그런게 없어지는 것 같아요. 남을 의식을 안하죠. 피해도 안주고. 나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이 대인 관계를 최대한 안하는 것이었어요. 그러니 그게 정신적으로는 안 좋았어요. 그것이 나를 지키는 방법이었는데, 그래서 우울증과 조울증 문제가 굉장히 심해졌어요.
우리 한국사에 가장 부족한 대목이 자원봉사가 부족하다는 것이에요. 봉사를 안해요. 그런데 미국에 문화는 봉사를 아주 잘 하잖아요. 우리도 자원봉사를 좀 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이제 봉사 많이 할거에요.
그렇게 이민을 오셔서 힘든 생활을 사셨는데, 한국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은 없나요?
사실, 한국에 이제 아무도 없어요. 저는 이제 미국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국은 한번씩 꿈 속에서나 그려보는 곳이지요… 그 아름다웠던 한국. 우리 한국처럼 아름다운 곳이 없습니다. 작지만 참 하나님이 복 주신 나라에요.
전 배낭을 매고 전 세계를 다 다녀왔습니다. 그게 저의 삶이었어요. 그래서 미국에서도 만 불만 벌면 밖에 나가서 한 7개월 살고 그랬지요. 제가 7년 전에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선교를 갔었어요. 그곳에 가서 제가 몇 개월 못먹고 돌아다니니까 폐렴에 걸렸습니다. 그때 폐렴이 너무 심해서 몸에 전신마비가 왔어요. 휠체어를 타고 기어다니고… 젊었을 땐 괜찮았는데 병이 드니까 모아둔 돈이 없잖아요. 그래서 제가 D.C.에서 노숙자 생활을 2년을 했습니다. 그 후 좀 더 날씨가 나은 곳으로 가는게 좋겠다는 의사의 권고에 로스앤젤레스로 이사를 왔습니다. 이 곳에서 또 노숙자로 몇 달을 살았어요. 노숙자의 삶에서 가장 고달픈게 뭔지 아세요? 아주 기본적인 위생 조차 유지할 수 있는 곳이 아무데도 없다는 거에요.
미국은 구하면 문이 열리는 곳이에요. 이게 가능한 나라죠. 한국은 두드려도 문이 안 열려요. 제가 5-6년 전에 장애인 지원을 받게 됐어요. 연금으로 지금까지 생활을 했지요. 어렵더라도 미국은 좋은 나라입니다. 여기는 조국입니다. 한국도 조국이지만. 그래서 저는 미국도 굉장히 소중하고 한국도 소중합니다. 그런데 우리 코리안 아메리칸들은 도대체가 선거를 안해요. 선거를 해야, 힘이 있어야 여기 예산도 많이 받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생각을 잘 안 하나봐요. 투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르는 것 같습니다. 선거권을 왜 사용을 안하나요? 더 나은 혜택이 있는데…그게 참 안타까워요. 저는 우리 한인들이 정말 전문 분야에, 어느 분야에서도 우뚝 서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민족은 사실 단점보다 장점이 많은 민족이에요. 한국인이 갖고 있는 열정은 타민족에게는 없어요. 우리 한국은 자원도 없잖아요. 오직 인적 자원 하나로 여기까지 왔는데…저는 한국이 갖고 있는 힘은 인적 자원인 것 같아요. 그것이 우리 한국의 큰 자산이고요. 한국에 있는 인물들도 한국의 자산이겠지만, 여기 미국에 있는 코리안 아메리칸 세대도 한국의 아주 큰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정부가 우리 코리안 아메리칸 세대를 위해서 좀 투자를 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하려면 이곳에 선거권 갖고 있는 사람들이 선거 좀 많이 해서 예산을 많이 받아야겠지요. 우리가 서로 공생하는, 서로 살려주는 민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동부에 있는 어떤 대학 교수님이 저의 멘토입니다. 그런데 그 형님이 저에게 한 고백이 있어요. 굉장히 중요한 얘긴데요,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내가 미국 사람인 줄 알았어. 20대에 내가 대학 교수가 되고 동양인으로서 학장도 되고… 그런데 이번에 알았어. 나는 한국인이라는 걸. 완벽하게 미국인처럼 동화될 수 없다는 것을 말이야. 우리가 공부를 열심히 하고 하버드를 졸업한다 해도, 우리는 한국인이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으면 안됩니다.